사회 참여와 교회의 소명

27,990 2017.05.11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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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부가 출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새 정부에게 거는 기대와 소망은 조만간 상실감과 낭패감으로 바뀌게 될 지도 모른다. 바사 왕 고레스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사45:1)로 불렸으나 그가 진정한 메시야는 아니었듯이,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구원할 구원자가 새로 임기를 시작하는 대통령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세상 권세자에 대한 어떤 기대나 소망도 갖지 않고 세상을 등지고 십자가 지는 식의 타계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기 주권을 행사 한 다음 교회는 자기 본연의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헤르만 바빙크는 교회의 소명은 “모든 세대에 걸쳐 사람들의 생각을 굴복시켜 성경 속의 하나님의 뜻에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교회가 소명 받은 모든 활동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일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헌신이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사회 변화는 죄로 인해 오염된 인간의 지정의가 새롭게 되는 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 일은 복음 전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오늘날 교회 개혁을 부르짖는 일부는 복음 전도보다 사회 개혁에 중점을 준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일은 이 정도로 해두고 이제는 사회 개혁의 주체로 나서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권익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신자가 정치와 사회 참여 운동에 지나치게 가담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이 견지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신념에 따라 행동하게 되고 그 안에 자기 의의 기반을 두게 된다. 그리고 자기와 같지 않은 이들을 ‘행동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라 비난하게 되고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복음을 가볍게 생각하게 된다. 사회 개혁에 너무 깊숙이 발을 들여 놓았다가 복음을 이념화시킨 사회복음주의자들의 실수를 또 다시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가 사회 참여를 하는 이유는 사회 참여에로 소명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의 문을 열기 위한 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들어온 초대 선교사들이 교육과 의료 사업에 종사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복음 전도와 사회 개혁 운동은 양극단에 있지 않다. 이런 사실을 알았던 19세기 스코틀랜드의 신학자요 설교자였던 토마스 챨머스 목사(1780-1847)는 “진정한 개혁은 인간의 내적 개혁을 통해서 오는 것이지 정치 구조 개혁이라는 외적인 변화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필자는 교회가 세상을 효과적으로 변화시키는 방식은 무력이 아닌 복음 전도를 통한 회심임을 믿는다. 죄인이 거듭나고 회심하면 사회 문제는 최소화되며 혹 사회 문제가 발생해도 기독교적 가치관을 따라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 사회가 복음화되면 현재 핫이슈가 되어 있는 성소수자 차별 금지법을 제정하는 일들은 말조차 꺼낼 수 없는 분위기가 될 것이다.

  물론 교회가 복음전도에만 열심을 내어서는 안 된다. 복음 전도의 주체인 신자의 신앙 인격이 변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사회 참여에 실패하는 원인은 의지의 박약함과 소신의 부족이 아닌 성화되지 못한 신앙 인격에 있다.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고 나선 시민 단체와 사회적 기업을 경영하는 이들,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이 종국에는 비난을 받는 이유도 신앙 인격의 부족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신자는 자기를 부인하는 일에 힘써야 하며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이루어가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사회 변화는 교회의 소명에 충실함으로 맺어지는 자연스러운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오늘날 스위스 제네바에 UN에 속한 기구와 구호 단체들이 유독 많은 이유는 칼뱅이 제네바시를 복음화하고 구제에 힘썼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 사회가 기독교화된 것은 노예 제도를 폐지하는 일에 앞장섰던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나 고아들을 위하여 평생을 헌신했던 죠지 뮬러(1805-1898), 그리고 노예 해방 운동에 앞장섰던 인도 선교사 윌리엄 캐리(1761-1834)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구현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처음부터 세상을 바꿔 보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었던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속한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였고 그 결과 사회가 변화되는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새로운 정권이 출발했다. 교회는 새 정부가 국정 운영을 올바로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어야 하고 권세 잡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사회 참여는 교회가 전면에 나서는 방식을 지양하고 개인적으로 사회 공익에 이바지하는 길을 모색하며 가정과 사회를 비롯한 삶의 전반에 기독교적인 가치를 구현하도록 지도하고 독려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사회 참여를 하는 가장 바람직한 길이다.

* 이 글은 개혁신보 2017년 5월 10일 자 '시론'에 실린 글입니다(http://repress.kr/5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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