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스승을 생각한다

7,294 2011.11.29 17:30

짧은주소

본문

이왕이면 가르치는 일도 잘 하고 그 가르침을 모범으로 보여주는 스승이 좋은 스승일 것이다. 가르치기는 잘 하는데 모범을 보여주지 못하면 배우는 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이 어떻게 삶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지 알 수 없고, 스승의 가르침을 실현하고자 하는 마음도 갖기 힘들기 때문이다. 교훈은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모범은 그 의무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음을 확신시켜 준다. 이런 면에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스승이란 수준 높은 가르침과 함께 그 가르침을 모범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이런 지도자를 영입하기 위해 엄청난 재정을 투자하는 일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지도자 한 사람을 잘 스카웃하면 스포츠 선수나 한 대학이나 기관이 단기간에 획기적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은 좋은 선생이 아닌 잘못된 선생이 시대의 사표(師表)가 될 때 그 파괴력이 엄청나다는 사실이다. ‘꿩 잡는 게 매’라고 어떤 사람이 획기적인 성과를 보여줘서 시쳇말로 뜨게(?) 되면 너도 나도 그 사람을 스승으로 모신다. 청교도인 랄프 베닝(Ralph Venning)은 “지휘자의 죄는 죄를 명령하는 법이고, 통치자의 죄는 죄를 지배하는 법이며, 가르치는 자의 죄는 죄를 가르치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스승이 잘못된 모델이 될 때 그 폐해가 얼마나 심각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말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실용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시대다. 어느 누구라도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성과를 드러내기만 하면 모든 이들이 스승으로 인정하는 시대다.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은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 그를 따르다가 평생은 물론 내세까지 망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엘리사나 디모데처럼 스승을 잘 만나야 한다. 거짓 선지자와 바리새인 같은 스승을 만나면 그들과 함께 구렁텅이에 빠질 수 있다.

그러면 어떤 스승이 좋은 스승인가? 세상에서는 모든 사물의 이치와 원리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스승이 좋은 스승이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가장 적확하게 드러내는 스승이 좋은 스승이다. 자신의 신학을 삶의 현장에서 드러내어 이론과 지식으로만 남아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구현해 내는 스승이 좋은 스승이다. 어거스틴과 칼빈과 존 오웬이나 죠나단 에드워드처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고 하였다. 스승은 한 분야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제자들을 지도하는 사람이다. 반면에 아비는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사람이다. 스승은 교훈을 줄 뿐이지만 아비는 생명을 준다. 그러므로 좋은 스승은 아비 같은 스승이다. 가르침과 함께 생명을 주고 모범을 보여주는 스승이 좋은 스승이다. 좋은 스승은 사도 바울처럼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없는 교육은 실패한 교육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한 것은 말씀을 가르치기만 할 뿐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스승들과는 달리 자기 가르침을 삶으로 실천해 내는 ‘사람으로서의 나’를 본받으라는 뜻이 아니었다. 바울도 연약한 자요 오류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면에서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고 한 것은 자신의 마음과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식하면서 “나를 본받으라”고 말한 것이었다.

좋은 스승이란 제자로 하여금 자신이 아닌 참 선생이신 그리스도를 본받게 만드는 사람이다.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고 하였다. 중매쟁이는 두 사람의 연을 맺어 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자이다. 그런데 교회 스승 중에 못된 중매쟁이처럼 자기가 신부감과 신랑감을 취해버리는 일들이 없지 않아 있다.

어떤 스승들은 특정 분야에서 이 세상에 자기보다 더 좋은 스승이 없는 것처럼 제자로 착각하게 만들어 자신이 쳐 놓은 펜스를 절대 넘어가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스승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참 스승이 아니다. 참 스승은 세례 요한처럼 더 좋은 스승이 있으면 그 스승(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스승은 자기를 절대화 하지 않는 스승이다. 어떤 오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스승은 세상에 아주 없다. 인간은 모두 무지와 연약에 쌓여 있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들은 자신이 이제껏 경험한 스승 중에 인상적이었던 한 스승만을 고집하며 그를 마치 오류가 없는 스승처럼 여기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한 스승만을 고집하기보다 하나님께서 교회 역사 가운데 세우신 스승 몇 사람을 자기 스승으로 삼는 방법이다.

주님께서 교회 안에 스승을 두신 목적은 유일한 스승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가르치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스승은 자기 지식을 가르치기보다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하며, 배우는 자는 스승을 배우기보다 그리스도를 배워야 한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모두 그리스도를 배우려고 하는 동일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인간 스승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가정교사)일 뿐이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 23:8)

* 이 글은 2010년 5월 12일자 개혁신보(www.rpress.or.kr)에 게재된 글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