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는 하나님이 주신 변화의 기회

26,792 2012.12.31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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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는 하나님이 주신 변화의 기회
최덕수 목사(현산교회)

마침내 새해가 밝았다. 어제 떠 오른 해와 정월 초하루에 떠오르는 해가 다른 해가 아님에도 굳이 새해 첫 날 떠오르는 해를 보고자 먼 길 마다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가 자신에게 또 다시 주어졌다는 사실을 보다 생생하게 누리고 싶은 생각에서가 아니겠는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완벽한 환경이 구비 되어 있어도 시간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곤욕이지 기쁨이 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시간과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이다.

시간과 기회는 변화에 대한 기대감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새해는 도살당할 돼지처럼 육신의 살을 찌우는 시간이 아니라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이다. 그러므로 변해야 한다. 변하는 시대를 따라잡기 위함이 아니라 변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기대를 이루어 드리기 위해 변해야 한다.

변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 달리 피조물의 변화는 필연적이다. 피조물은 흥하거나 쇠하거나 좋아지거나 나빠지거나 반드시 어느 한 쪽으로 변하게 되지, 정체된 체로 마냥 있을 수는 없다. 겉으로 볼 때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 보이는 것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미세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언제나 거기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산도 변하고 가치관과 시대정신도 변한다. 하물며 육을 입고 시간의 흐름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이랴!

문제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변해 가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변해 가느냐, 아니면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본성의 악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변해 가느냐,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가? 바울은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하였다(고후 4:16). 겉사람은 단순히 몸만 의미하지 않으며, 속사람 역시 몸과 구분되는 영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겉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피조물로서의 운명이며, 속사람은 신적 생명의 주체로서의 영혼을 의미한다.

우리의 겉사람은 살아온 세월만큼 낡아졌고 낡아지고 있다. 그것은 겉사람이 육체적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특징이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지나간다.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겉사람의 낡아짐 때문에 의기소침해한다. 자기 몸에서 생긴 이상 징후를 의사에게 내 보인 후, “그것은 일종의 노화 현상입니다”라는 대답을 들으면 우울해 한다. 반면에 사람들로부터 ‘더 젊어졌다’는 인사를 받으면 좋아한다. 이것은 사실이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세상이 주는 위로로 만족해하는 순간에도 겉사람은 낡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는 완전하진 않지만 새생명을 누리고 있는 속사람이 새로워지는데 시간을 소비해야 한다. 겉사람은 쇠하여도 죄성의 불꽃은 꺼지는 법이 없고,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성화를 이루어도 속사람은 만족하는 법이 없다. 속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성화의 과정 내내 거룩한 불만을 갖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속사람 안에 죄와 죽음으로부터 죄인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생명이 날마다 역사하도록 해야 한다. 날빛보다 더 밝은 하나님의 얼굴 빛을 바라보아야 한다.

충분한 햇빛을 받지 못하면 비타민 부족으로 각종 질병에 걸리는 것처럼, 진정한 태양이신 그리스도의 빛을 공급받지 못하면 영적 골격이 약해져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뛸 수 없다(말 4:2). 그러므로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나아가자. 빛 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자! 우리에게 주어진 변화의 기회인 새해를 복에 복을 더하는 시간으로 삼자! 인간 영혼의 생존과 건강은 새롭게 주어진 변화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 이 글은 2013년 1월 1일자 개혁신보(www.rpress.or.kr) 신년특집호(제635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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