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안수, 왜 비성경적인가?

21,780 2011.05.14 18:29

짧은주소

본문

여성안수에 관한 논란은 성경 해석과 적용에 대한 차이에서 시작되어 여성안수 논쟁에 관한 본문의 사본학적(본문 비평) 문제로 비화되면서 점점 그 열기는 더해가고 있다. 성경본문에 대한 올바른 해석에 기초하지 않은 주장과 논리 전개는 사상누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긍정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수 천 년 동안 검증되어져 온 성경본문을 지금에 와서 문제 삼으면서 본문 비평 문제까지 들고 나와 자기 논리를 펴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볼 수 없다. 최갑종 교수는 김세윤 교수가 사본학적인 이유를 들어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을 후대에 삽입된 비 바울적인 본문으로 단정한 것에 대해서 비평하였다. 상당수의 학자들(Antoinette Clark Wire, Curt Niccum, Ahthony C. Thisleton, David E. Garland)은 여성안수 문제와 관계없이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진정성을 계속 유지하려 한다. 목회와 신학 2005년 7월호 p.169를 보라.

교회는 사람의 아이디어나 시대적인 상황이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질서에 따라 세워져야 한다. 여성안수 문제도 마찬가지다. 여성안수 문제는 작위적(作爲的)으로 해석할 수 있거나 아무래도 좋은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성막 제도를 세밀하게 계시하신 후에 제사장 제도와 레위인 제도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신약시대에는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성례와 직분에 대해서도 계시하셨다. 이 일에 인간의 아이디어와 상상력이 발휘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대적이고 문화적인 상황을 핑계로 분명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억지로 비틀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신부인 교회는 항상 시대적이고 문화적인 상황을 고려하기보다 최우선적으로 남편이신 주님의 말씀에 순복해야 한다. “우리가 안수 문제를 논쟁할 때 중요하게 다룰 부분은 예수님 당시의 사회적 정황이 아니라 구약 성경과 예수님의 여성에 대한 교훈”이어야 한다.” 홍창표, “여성안수에 대한 부정적 평론”, 신학정론, 제 8 권 2호, p. 351

필자는 전문 신학자가 아닌 목회자이다. 목회자라고 해서 목회 현실을 근거로 논리를 펼 수는 없다. 현실적인 문제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거나 어떤 전제를 가지고 대하면 성경을 현실에 맞추는 식으로 적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로지 성경에만 근거하여 여성안수가 왜 비성경적인 일인지 밝히려고 한다.


1. 여성안수는 창조 질서에 맞지 않다.

사도 바울은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할 첫 번째 이유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다고 말한다(엡 5:22-23).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친히 교회를 통치하고 다스리는 것처럼, 아내는 남편을 머리로 인정하고 남편의 다스림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무엇을 근거로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말했는가? 우리는 그 근거를 창세기 2장과 3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남자를 먼저 창조하셨고, 여자는 남자에게서 취하셨다. 즉 여자를 지으실 때는 남자를 지으실 때 사용하셨던 흙으로 사람을 빚어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남자의 갈비뼈를 가지고 여자를 지으셨다. 가정 사역을 전문으로 하는 S 목사는 하나님께서 여자를 머리뼈로 만들지 않으신 것은 남자를 지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고, 발가락뼈로 만들지 않은 것은 남자에게 밟혀서 무시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면서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로 만든 것은 곁에 두고 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교재: 가정을 깨운다). 하지만 이는 자기 해석에 불과하다.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여자가 영적 본질에서 뿐 아니라 그 몸의 재료에 있어서도 남자와 동일한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왔다. 이는 성부 하나님에게서 성자 예수님이 나신 것과 동일하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두 인격이지만, 한 몸이다. 이런 면에서 삼위 하나님의 속성은 한 사람에게 나타난다고 볼 수 없다. 남자와 여자, 정확하게 말하면 남편과 아내에게 나타난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삼위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지만, 한 몸, 한 본질을 이루고 계시듯이 남자와 여자는 엄연히 다른 두 인격이지만, 한 몸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딤전 2:11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여자가 남자의 다스림을 받아야 할 이유를 두 가지 제시했는데, 첫 번째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사단의 꾀임을 여자가 먼저 받았다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이기에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하여금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짐승들의 이름 짓는 일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여러 종류의 생물들의 이름 짓는 일을 아담에게 맡기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모종의 권위를 주셨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또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금지명령을 최초 아담에게 주셨고, 아내인 하와는 선악과 금령을 남편인 아담으로부터 듣게 하심으로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나타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 하와는 사단의 꾀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이 때 하나님은 하와에게 형벌을 선언하셨다. 그 형벌 중에 하나는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선언이었다(창 3:16b). 뱀이 하와를 유혹했을 때 마땅히 남편 아담의 뜻을 물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묻지 않고 제 멋대로 마귀에 의해 충동된 욕심을 따라 범죄한 하와를 하나님은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 위치에 있게 하신 것이다. 이런 예는 인류가 타락하기 전은 물론 타락한 이후에도 아내는 남편의 다스림 하에 순복해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 보이신 분명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고전 11장 3절에서 사도 바울은 여자에 대한 남자의 머리됨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의 관계로 설명한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이와 비슷한 표현이 이사야 7:8-9절에 나온다.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 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 70인역은 ‘대저 아람의 머리’에서의 ‘머리’를 번역하면서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남자를 ‘머리’라고 했을 때와 똑같은 단어인 케팔레(kefalh.)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우리는 이를 흔히 경륜적(economic) 삼위일체라고 부른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은 그 능력과 신성과 영광과 권세에 있어서는 동등하지만, 구원의 목적을 위해서 아들은 자신을 성부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시켰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는 요한복음 17장 4절 말씀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러므로 아내는 반드시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아내들에게도 유익하다. 아무런 제약 없이, 그 어떤 권위자 없이, 사는 삶은 절대로 자유스럽지 않다.
목회자들 중에 에베소서 5장을 근거로 남편이 아내의 머리이니 머리로 세운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메시지를 한 두 번 전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여자가 남자의 다스림과 통치를 받아야 함에도 교회에서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는 일과 주관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자연스럽지도 않고 바르지도 않다. 이에 대하여 ‘교회와 가정은 다르지 않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원형에 놓고 ‘부부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분명히 가르쳤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정 안에서 남편이 주관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창조 질서’인 동시에 ‘교회 안에서도 이루어야 할 질서’로 본 것이다. 신학정론 8권 2호, 여성안수에 대한 부정적 평론, 홍창표, p. 299



2. 교회 직분자는 남자여야 한다는 것에 대한 성경적 근거

1) 예수께서 12사도들을 여자로 뽑지 않으신 일
K 교수는 2004년 5월 목회와 신학의 글에서 “왜 예수님은 여자들은 12제자 중에 하나도 뽑아 세우시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을 하면서 “이것은 아마 예수의 문화적 상황에 대한 양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 그러면서 “당시 유대교의 상황 속에서 예수께서 그 상징적 ‘열둘’을 단 한 두 명이라도 여자로 채웠다면 그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얼마나 더 큰 비판과 저항을 받았겠습니까? 그렇게 해가지고 하나님의 복음이 효과적으로 선포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목회와 신학, 2004년 5월호, p. 64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남자로 세우신 것은 문화적인 상황을 고려한 조치였다는 말인데, 이는 예수께서 부활의 증인으로 여자를 세우신 것, 그리고 여자들이 최초 부활의 증인이었음에도 가룟 유다 대신에 여자를 사도로 세우지 않고 남자(맛디아)를 사도로 세우신 일과도 모순된다. 신학정론, 제 8 권 2호, p. 314

예수께서 사도들을 남자로 부르신 것은 문화적인 양보 때문이었다는 주장은 성경계시와도 모순된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나고 난 다음, 사도 베드로는 이방인(고넬료 가정)들에게도 성령 세례가 주어진 일을 목격하게 된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할례자들이 베드로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는 것을 두고 비난하였다. 이 때 베드로는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행 11:17)고 하였다. 이처럼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성령 하나님은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선입견을 철폐하는 일에 앞장 서셨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만약 여자를 사도나 목사로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고넬료 가정이나 사마리아나 에베소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려오심으로 이방인들도 동일한 오순절 성령세례에 참여한 자임을 증거하셨듯이, 여자들도 안수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거부할 수 없는 증거를 보이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여성에게 안수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 사도들과 집사를 남성으로만 뽑은 일 (사도행전 6:1-6, 디모데전서 3:8-13)
초대교회는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 빠진다는 이유로 그 불만을 풀어 주고, 동시에 사도들로 하여금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일곱 집사를 뽑았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남자였다. 예루살렘 교회의 문제는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 빠지는 문제였다. 이처럼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여성, 그것도 과부들이었다면, 여성들을 뽑아서 집사로 섬기게 하는 것이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여성을 뽑아서 집사로 섬기게 해야 하는 교회가 있었다면 그 교회는 다름 아닌 예루살렘 교회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도들은 단 한 명의 여 집사도 세우지 않았다. 그 이유는 뽑을 사람은 ‘남자’여야 한다고 열두 사도가 말했기 때문이다. 개역 개정판에 ‘칭찬받는 사람’이라고 할 때 ‘사람’은 헬라어로 아네르(avnh,r)인데, 이 단어는 대개 성인 남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6장 5절에서 선출된 남자의 이름을 봐서도 알 수 있다. 진리의 깃발 제 95 호, “여성을 집사로 뽑아야 하는가?” George W. Knight 의 글 p. 57

사도들이 남자를 집사로 세우도록 했다면 말씀을 전하는 목사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디모데전서 3장 8-13절을 보자. 거기에 먼저, 감독과 집사 모두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3:2, 12)는 말이 나온다. 이 문맥에서도 감독과 집사는 남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바울은 디도서 1장 5절 이하에서도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라고 하였다. 이는 사도행전 6장에서 요구하는 바 집사가 남자여야 한다는 규정을 따른 것이다.
논란이 되는 것은 디모데전서 3장 11절에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라고 할 때 ‘여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것이다. 이들을 ‘여자 집사’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것은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 11절에 ‘여자’라는 말에다가 ‘집사’라는 말을 붙여서 ‘여자 집사’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은 자의적인 해석으로 이렇게 하는 것은 바울이 하지 않은 말을 우리가 하는 셈이 된다. 홍창표 교수는 11절에 여자가 나오는 문제를 감독과 집사를 말한 후 그들의 아내에 관한 말을 한꺼번에 하기 위해 “여자들”이라고 했을 것으로 본다. 신학정론 8권 2호, p. 340
이렇게 보면 11절 말씀은 ‘집사인 남편들이 행하는 일에 집사의 아내들을 격려하고 잘 활용하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진리의 깃발 제 95 호, p. 66.



3. 여자를 직분자로 세우신 경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사사기 4장 4절에는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라고 기술하고 있다. 우리말 성경은 “그 때에(ayhi(h; t[eîB')”라는 시간을 나타나는 부사구가 나오지만, 원문에는 ‘드보라’라는 이름이 제일 먼저 나타난다. “드보라는 여자요, 여선지자요, 랍비돗의 아내였으며, 그 때에 이스라엘을 사사로 다스렸다”고 되어 있다. 이렇게 사사기 기자가 드보라가 여자라는 사실을 제일 먼저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교회가 큰 위기에 처하였을 때 당연히 그 위기에 제일 먼저 나섰던 자들은 남자였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물론 사사 시대에 일어났던 모든 사사들도 다 남자였다. 민수기는 싸움에 나갈 만한 자의 수를 계수할 때 당연히 남자를 계수했다고 말한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싸움에 나서는 일은 남자가 적격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여자인 드보라가 나섰다. 이는 비정상적인 일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큰 위기에 처하였을 때 당연히 남자가 나서야 한다. 이처럼 남자가 사사로 세움 받지 못하고 여자가 사사로 세움 받았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이 남자가 나서지 않는 비정상적인 상황이었음을 보여준다. 여자를 세워 교회를 구원하신 일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일이다. 관용과 너그러움과 약자를 돌아보는 용기와 담대함,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민족을 돌아보는 참된 남성다움을 소유한 남자가 당시에는 없었던 것이다. 드보라는 남성들이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쓰신 여자 사사였다. 드보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하는 일을 하였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는 선지자로서 역할을 감당하였다. 드보라는 바락에게 사람을 보내어 여호와의 말씀을 인용하여 증거하기까지 하였다(삿 4:6-7).
결국 적장 시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겐 사람에 의해서, 그것도 그 집 가장이 아니라 연약한 여인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묘하게 이스라엘의 사사로 등장한 드보라도 여자고, 시스라를 죽인 야엘도 여자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구원 사역이 여자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교회가 큰 위기에 처하였을 때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남자 대신 연약한 여자들의 손을 들어 교회를 구원하신 사건은 특별한 사건이요 비정상적인 일이다.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이렇게 되지는 않았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나 전쟁을 수행하는 일은 남자가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5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선지 드보라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여인들이 나서서 전쟁을 수행하였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다. 여성들이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하는 일이 일반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이사야서 3장에 의하면 이런 일들은 하나님을 거역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사야 3장 1-5절, 12절은 이런 상황을 영적으로 혼돈스러운 상황으로 소개한다.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그가 의지하는 모든 양식과 그가 의지하는 모든 물과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오십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정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를 그리하실 것이며 그가 또 소년들을 그들의 고관으로 삼으시며 아이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시리니 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하며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며”,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기요 다스리는 자는 여자들이라 내 백성이여 네 인도자들이 너를 유혹하여 네가 다닐 길을 어지럽히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을 거역할 때 온갖 질서가 뒤바뀌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재판관과 선지자와 장로와 같은 지도층 인사들의 기본적인 삶의 자세가 흐트러지고 여성들이 지배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교회 질서가 완전히 뒤집어진 것을 보여준다.
요즘 시대에는 페미니즘(feminism)이 노골화된 시대다. 여성들에 의한 지배가 늘어나고, 아이들이 집안을 다스린다. 실제로 요즘 가정의 주인은 가장이 아니고 자녀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집이라도 팔아서 뒷바라지 한다. 이것이 현 시대의 난맥상인데 이사야 시대에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자를 일으켜 교회를 위기 상황으로부터 구한 사건을 왜 성경에 남겨 놓으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믿음으로 행하지 못한 자들과 남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위함이다. 칼빈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의 연약한 것들을 취하시어 육체의 가장 고상한 것들을 부끄럽게 만드시는 한 예라고 생각하였다. 칼빈의 여성관. J. D. 더글러스. 심창섭 역. 솔로몬 p. 103. 칼빈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여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신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을 여자들의 학교에 보내어 그들을 통해서 그 제자들이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도록 하신 것은 가벼운 채찍이었다”고 하였다. 칼빈 요한복음 주석 p. 140
바락이 드보라로부터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우물쭈물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 남자들의 형편을 보여준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남자들이 신앙과 용기를 보이지 못할 때 하나님은 여인을 일으켜서라도 그의 구원 역사를 이루신다. 이는 우리로서는 감사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남자로서는 부끄럽기 그지 없는 일이다. 한국교회 남성들이 각성하지 않는다면 남자들이 마땅히 담당해야 할 영역에서조차 여인들을 하나님이 들어 쓰셔서 남성들을 부끄럽게 하실 것이다. 실제로 그런 날이 이미 도래하였다. 여성 목사가 나오고 있는 시대가 아닌가?


4. 사본학적으로 문제가 제기되는 구절에 대한 해석

1)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
K 교수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ai` gunai/kej evn tai/j evkklhsi,aij siga,twsan\)고 말하는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 말씀은 사본학적으로 불안정하다”고 주장하면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것은 원문에는 없던 것으로 나중에 첨가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목회와 신학, 2004년 5월, p. 66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이 전후 문맥과 동떨어져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언뜻 보면 앞에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이 앞서 논의된 이야기와는 다른 주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사도 바울은 예언과 방언과 관계해서 잠잠해야 한다는 말을 계속해서 해왔다. 30절에서 “예언 시에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있으면 잠잠하라”고 하였는데, 34절에서도 “잠잠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27-29절에서도 말하는 문제를 다루고 34절에서도 여자가 말하는 것에 대해서 다룬다. 그리고 32절에 ‘종속된다’는 뜻의 “제재를 받나니”라는 말이 나오는데, 34절에서도 복종할 것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그리고 31절에 배운다는 말이 나왔는데, 35절에서도 배운다는 말이 나온다. 이런 문맥의 흐름을 보면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이 문맥과 전혀 상관없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여자는 교회당이라고 하는 장소에서는 아무 말 해서는 안 된다’는 뜻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여자는 교회에서 어떤 말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이 말씀은 여성들은 무엇을 알고자 하는 지식 욕구를 억제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을 남성들은 교회에서 질문해도 괜찮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집회 시에 질문을 삼가야 하는 존재는 비단 여성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은 여인은 예언하거나 기도할 수 없다는 뜻도 아니다. 왜냐하면 11장 5절에 보면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 쓴 것을 벗고 기도와 예언하는 문제를 사도 바울이 다루었고 사도행전에 빌립의 네 딸들이 예언했다는 사실이 나오기 때문이다(행 21:9).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앞서 사도 바울은 28절에서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였고, 30절에서는 ‘예언 시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예언하던 자는 잠잠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34절의 말씀은 여성들도 어떤 조건 하에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여성은 어느 때 침묵해야 하는가? 우리는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 뒤에 나타나는 35절에서 여성들이 무엇에 대해 잠잠해야 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은 35절에서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교회당이라고 하는 물리적 영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공예배시의 상태를 가리킨다. 본문 26절에 이미 바울은 “너희가 모일 때에”라고 함으로 이어지는 권면이 공예배 시에 적용되어야 할 말씀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므로 “여성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이 공예배 시 여성들의 질문과 관련된 명령임을 알 수 있다. 여성들이 예배 시에 설교들이나 예언들이 깨달아지지 않을 때 질문을 많이 했던 것 같은데, 이 질문을 하지 말도록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경은 남성과 여성과의 관계를 동등성과 종속성의 관계로 설명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라는 면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지만, 머리의 관점에서는 남성이 여성의 머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남편의 권위 아래 있어야 할 결혼한 여성이 공적인 집회에서 말을 하게 되면, 여자가 공중 앞에 선생으로 나타나게 되고,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만드신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어그러지게 된다. 이에 사도 바울은 “여성들에게 잠잠하라”고 하면서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니라”고 말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공예배 시 여성으로 하여금 질문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여성의 권위를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배 시 질서문제 때문이었다. 사도 바울이 문제 삼은 것은 누구에게 물어 보는 것 자체가 아니라 ‘공예배 시와 공예배가 파했을 때’라는 상황의 문제였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여기 ‘교회’라고 하는 말은 예배가 진행되는 상황을 가리키고, ‘집’이라는 말은 예배가 마쳐진 상황을 의미한다. 결국 사도 바울은 여성들에게 비록 공예배 시에 질문할 거리가 생기더라도 예배가 마쳐진 다음 남편에게 질문하도록 한 것이다.
교회에서 여성이 잠잠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여성은 남성에게 복종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분들은 ‘남성에게 복종하는 것은 그 당시 문화이고 지금 시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데, 성경은 여성이 남성에게 복종하는 것은 문화가 아닌 율법의 가르침이라고 34절에서 분명히 말씀한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막연하게 “율법에 이른 것 같이” 라고만 되어 있고 구체적으로 율법의 어느 부분에 나오는지 설명하지 않는데, 그것은 여성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가르침이 어느 특정 구절이 아니라 율법의 전체적인 가르침이었기 때문이었다. 홍창표 교수는 ‘율법’을 창조질서(창 1:27, 2:18-23)로 보았다. 신학정론 8권 2호, p. 325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한 말씀은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는 복종의 원리가 무시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는 말씀은 당시 여성들이 교회에서 거리낌 없이 나서기를 좋아 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36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라고 묻고 있는 것은 당시 여인들이 교회 안에서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였음을 보여준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이것은 율법의 가르침이라”고 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 주어진 말씀이었다.
방언하는 사람과 예언하는 사람이 상황에 따라 잠잠해야 하는 것처럼, 바울은 여성들에게 예배 가운데서는 질문하지 말고 잠잠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여성상은 항상 우아함과 섬세함을 갖추는 것이다.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라고 할 때 “부끄러운 것(aivscro.n)”이란 말은 본래 “추한, 볼품 없는 것”이란 뜻이다. 남성도 마찬가지이지만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이렇게 저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볼품없어 보인다.


2) 디모데전서 2장 11-12절
디모데전서 2장 11절 이하의 해석과 관련하여서도, 앞에서 제시한 K 교수의 의견과 유사한 사본학적인 비판이 존재한다. 일부 사본에서는 본문이 생략되어 있으며, 문맥상으로도 앞 뒤 구절의 흐름과 잘 맞지 않아 후대에 삽입되었다고 주장한다. 거기에 더하여 일부 사람들은 본문이 직접적으로 여성안수금지에 대하여 언급하는 구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본문의 ‘여자(gunai/kaj)’가 여성 일반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는 기혼여성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의 표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는 기혼 여성이 남편에 대하여 순종해야 함을 뜻한다는 것으로만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최갑종 교수는 디모데가 목회한 에베소교회에 속해 있는 여자 성도들, 특히 가정을 가지고 있는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일으킨 분쟁과 예배 시의 무질서를 경계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이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밝혔다 최갑종,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는가?”, 목회와 신학 2005년 7월. p. 168-177
. 사도 바울이 “여자들은 조용이 배우라!”고 가르치고 나서 그 근거로써 아담과 하와의 관계(13-15절)를 든 이유도 이 권면이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사도 바울은 이 본문을 통해 교회 내의 여성 전체의 지위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자유를 오해하여 남편과 아내의 질서마저도 파괴하고 남편을 가르치려 했던 당시의 기혼 여성들의 문제만을 특별히 지적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마저도 사도 바울 당대가 아닌 후대의 요구에 의해 삽입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2장 11절-15절에 대한 위와 같은 해석의 맹점을 지적하고 동시에 본문에 나타나는 여성에 대한 가르침이 후대에 삽입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일관성 있는 주장임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이 본문이 디모데전서 2장 전체의 맥락과 매우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 필연적이다.
디모데전서 2장을 이해하고자 할 때 먼저 기억해야 할 점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통하여 에베소의 각 지교회(evn panti. to,pw|,, 8절)들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디모데전서 2장은 목회적인 관점을 가지고 공예배에 대하여 가르치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유일한 중보자의 대속으로 인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진리와 구원으로 초대받은 교회의 구성원들(4~6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동등하다. 이 일치성은 그 어떠한 차별 -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혈통의 벽, 임금과 같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과 종처럼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신분의 고하,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의 차이 - 도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 교회 공동체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런데 이 교회 공동체의 관심과 기도는 교회 자체에게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며(1-2절)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신다(3절). 이처럼 사도 바울은 모든 교회의 구성원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성을 가지게 된 ‘하나’이며, 그들의 공통적인 관심이 항상 교회 밖을 향하고 있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남성의 기도에 관하여 권면하고 있는 디모데전서 2장 8절이 ‘그러므로(ou=n)’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즉, 그 기도가 ‘분노나 다툼이 없이(cwri.j ovrgh/j kai. dialogismou/)’ 행해져야 하는 이유는 교회의 구성원이 주 안에서 하나이며, 교회 바깥 세계를 향하여서도 자신들이 얻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그들도 얻기를 바라는 긍휼의 자세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도가 모든 성도의 동등한 권리이자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남성에게로 그 역할의 범위를 제한하고 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공예배의 질서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예배의 질서의 차원에서는 공적 기도를 남자의 역할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존 스토트는 이러한 맥락에서 디모데전서 2장에 대하여 정당하게 정리하기를,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교회의 공적 예배가 갖는 관심의 범위가 세계적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난 후에(1-7절), 예배에서의 행위를 다루면서 남자와 여자의 역할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8-15절).”고 하였다. 존 스토트, “디모데전서·디도서 강해” (IVP, 1999, 김현회 역). p. 74

여성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하는 9절 역시 ‘또 이와 같이(~Wsau,twj kai.)’라는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어서, 그 가르침이 8절과 같이 공예배의 질서의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여자들이 옷을 단정하게 입어야 하는 것도, 가르치는 역할이 허용됨이 없이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워야 하는 것도, 모두 공예배의 질서의 차원에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남성에 의해 공적으로 가르침이 행해지고 또한 설교가 행해지기를 원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질서의 이유를 창조의 원리에서 찾고 있다(13-15절. 이에 대해서는 본고 p1-2에서 자세히 밝혔다). 남성의 질서상 머리됨은 성적(性的)으로나 교회 구성원으로서의 동등됨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머리되신 것이 신성 안에서 성부와 성자의 동등성을 침해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존 스토트가 잘 이해한 것처럼, 하와가 먼저 속았다는 사실(창3:6,17)은 여성이 본성적으로 속기 쉬운 존재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와가 아담이 가져야 하는 정당한 질서상의 권위를 가로채고 각자의 역할을 뒤바꿈으로 해서 옳지 않는 주도권을 행사한 점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존 스토트가 근본적으로 여성 안수를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성이 섬김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성경의 권위 아래서, 남자가 지도자인 사역팀에 속한 일원으로 가르친다면 그 일을 위해서는 여성이 안수를 받는 것은 합법적이라고 생각한다. Ibid. p105 - 106
.
그러므로 공예배의 차원에서 여성이 남성을 가르치는 것과, 기도하는 것과, 목회적 권위를 행사하는 것(치리권), 또 그와 같은 목회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여성이 안수를 받는 것은 디모데전서 2장에 의하여 합당치 않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 성경적인 판단이요 하나님의 뜻임에 분명하다. 본문을 사본학적으로 재단하거나, 가정에서의 역할의 분담으로 축소시키거나, 시대적이며 문화적인 문제로만 치부하는 것은 본문의 맥락을 무시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뜻을 가리는 일이다.
어찌 여성이 남성만큼 가르치고 기도하고 권위를 행사할만한 능력을 가질 수 없겠는가? 그럼에도 서구 개혁교회에서는 여성이 예배 시에 회중을 대표하여 성경을 봉독하는 일까지 금한다. 진리의 깃발, 제 37 호, “여자가 예배시에 회중을 대표하여 성경을 봉독할 수 있는가?” Howard Griffith, 서문강 역, p. 36-39를 보라.
왜 그렇게 하는가? 디모데전서 2장 8절에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 다음에 여자들이 취할 행동을 9절에서 명시하고 있고, 가정에서 복종하는 양식이 교회의 공적인 집회에서도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Ibid. p. 38



5. 성령의 은사의 보편성과 직분의 제한성

여호수아가 회막으로 나아가지 아니한 두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 예언하는 모습을 보고하자 모세는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 11:29)고 하였다. 하지만 여호와의 영이 임한 모든 사람들에게 직분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는 일과 직분을 세우는 일을 구분하신 것을 볼 수 있다. 민수기 12장에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의 권위를 대적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대해 진노하셨다. 레위족속이었던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모세를 대적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셨다(민 16장). 이런 사건들은 교회 안에서 직분에 질서가 있어야 함을 증거한다.
이는 신약시대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하였다(갈 3:28). 이 말씀은 민족이나 신분, 성에 따른 구원의 원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가 다 동일한 원리, 곧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최초 세워 놓으신 질서(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간의 질서)나 교회 안에서 세워 놓으신 질서를 무너뜨리는 말씀이 아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관계성과 남녀의 성별을 취소하려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정론 8권 2호, p. 344
.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동일하지만 질서와 직분 상의 구별은 지금도 존재한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6. 결 론

성경을 근거로 어떤 논리를 세우거나 어떤 주장을 할 때는 보편타당한 논리를 도출해야 한다. 유리 한 조각을 찾아내어서 과거에 큰 건물이 있었다고 확신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적어도 건물의 기초나 기둥이 발견되어야 건물의 존재나 그 외형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여성안수 문제도 마찬가지다. 여성안수를 주장하려면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여성안수를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대적 상황과 흐름의 관점에서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치지는 못한다. 혹시 성경을 근거로 주장을 펼친다 하더라도 추론에 근거하여 자기 논리를 펴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유리 한 조각을 가지고 옛날에 큰 건물이 있었다고 확신하는 것과 같다. 만약 발견한 유리 조각이 건물의 창문 유리가 아니고 깨어진 병 유리라면 이보다 더 이상한 추론은 없을 것이다. 조병수 교수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롯을 구한 것을 사람의 구원에 일반화시켜서는 안되며, 하나님께서 발람의 나귀에게 말하게 한 것을 모든 짐승에게 일반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신비로운 경륜을 따라 남자의 역할에 여자를 참여시킨 특별한 경우를 일반화시켜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신학정론 23권 2호, p. 76
여성에게 안수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는 성경에서 찾아낼 수 없다. 대한 예수교장로회 개혁교단은 개혁주의 신학을 근간으로 삼는 교단인 것으로 알고 있다. 개혁신학의 방법론이 무엇인가? 성경이 가라는데 까지 가고, 멈추라는 데서 멈추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명백히 말씀하고 있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하기보다 침묵하는 겸손의 자세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남자와 여자의 구분은 엄연히 존재하고 직분의 구분도 엄연히 존재한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공동체이긴 하지만 남녀의 역할의 구분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남녀 역할의 구분이 완전히 해소되는 때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질 그 때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30)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아직 도래하지 아니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 양, 남성과 여성의 모든 구별을 철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전면 배치된다.
여성들도 얼마든지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분량에 따라 사역할 수 있다. 필자의 교회에서는 권사님이 유치부 아이들에게 설교한다. 디모데가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배웠던 것처럼 나이 많은 여성은 얼마든지 어린 자녀들을 가르칠 할 수 있다(딤후 1:5). 하지만 여성을 목사나 장로나 집사로 세울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 어디에서도 여성에게 안수했다는 근거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장로교 헌법에도 권사는 임시직으로 안수 없이 세우는 것으로 되어 있다.
. 여성안수 문제는 보통 문제가 아니다. 교회가 서느냐 넘어지느냐를 결정하는 문제이다. 훗날 우리들의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이 세대를 포함해서 다음 세대까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지혜롭게 처신해야 할 것이다.

최덕수 목사(일산 현산교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