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란 무엇인가?

9,101 2011.12.0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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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란 무엇인가?
교회 역사 속에서 형성된, 성경에 가장 충실한 공교회적 신학 전통
이성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

서론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다 보면, 항상 “개혁주의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대답해 주십시오.”라고 요구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이 질문은 “성경이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한 마디로 대답해 주십시오.”라는 질문과 성격이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성경이 무엇에 관한 책인지를 한 마디로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이것이 개혁주의이다!”라고 한 마디로 말할 수 없다. 그 만큼 개혁주의는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를 한 마디로 대답할 수 없다고 해서, 개혁주의의 실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아무런 실체가 없는 유령을 사수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믿음의 투쟁을 했다는 말이 된다. 또한 이것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헛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해서 성경의 가르침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듯이, “이것이 개혁주의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해서 개혁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개혁주의를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없다 하더라도 개혁주의가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은 가지고 있으며, 이 특징을 중심으로 개혁주의를 논하는 것이 개혁주의를 정의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에 하나일 것이다.


1. 신학 전통(a theological tradition)으로서 개혁주의
개혁주의의 특성을 다루기 전에 우리는 개혁주의가 무엇이 아닌가를 분명하게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먼저 영어에 개혁주의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혁교회(Reformed church), 개혁전통(Reformed tradition), 개혁신앙(Reformed faith)이라는 말은 사용되지만 개혁주의(Reformism)란 말은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개혁주의가 불변하는 어떤 고정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다.

폭넓게 말해서 개혁주의는 일종의 신학 전통이다. 신학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시에 대한 체계적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주어진 계시를 암송하면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답습만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시대와 여러 장소에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였고, 이 응답은 한 시대나 장소에 국한 되지 않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후의 세대들에게 전달되었다. 이것을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신학 전통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이전 세대들 보다는 훨씬 정확하고, 풍성하고, 정밀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이러한 신학 전통들이 없다면, 우리는 고대 교회가 고민했던 삼위일체나 기독론에 관련된 신앙의 본질적 문제들을 똑같이 반복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경만 있으면 신학전통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타임머쉰을 타고 2000년 전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2. 역사 속에서 형성 및 발전되어 온 신학 전통
개혁주의를 신학전통이라고 했을 때, 개혁주의가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개혁주의가 정형화된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특정 개혁교회를 가리켜 그 교회야 말로 참된 개혁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성경을 연구하여 얻어진 어떤 지식 체계를 개혁주의라고 할 수도 없다. 개혁주의는 교회의 역사를 연구함으로 찾게 되는 신학전통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신학 전통은 역사 속에서 여러 가지 갈래로 나뉘어져 왔다. 그 결과 어떤 신학 전통은 성경에 더 충실하기도 하고, 어떤 신학 전통은 원래의 성경적 가르침에서 멀어지기도 하였다. 심지어 어떤 전통은 그 멀어짐의 정도가 심하여 계시 그 자체와 정 반대의 가르침을 포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학 전통의 타락은 15세기와 16세기 서방의 로마 교회에서 두드러지게 되었는데, 특별히 구원론과 교회론에 있어서는 더 이상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타락하였다. 그들의 전통에 따르면, 구원은 인간의 행위를 필연적 원인의 하나로 보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전적이 선물이 아니다. 성찬에 있어서 그들의 화체설은 예배를 하나의 우상숭배로 만들어 버렸다. 성인들에 대한 기도의 허용은 유일하신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를 현저하게 끌어내려 버렸다.

개혁주의는 이와 같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출현한 신학 전통이었다. 이 전통은 이전의 전통을 없애고 새로운 전통을 만들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전통 중에서 원래의 본질적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을 교정하려고 하였다. 개혁주의는 수많은 역사적 논쟁 속에서 점점 더 구체화 되고 정교화 되게 되었으며, 이것들은 주로 신앙고백이라는 형태로 자기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개혁교회들은 이러한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형성되었으며, 개혁주의는 이 교회 속에서 강한 신앙고백적 전통을 유지하였고, 이런 전통 속에서 점점 더 풍성하게 자기 발전을 경험하게 되었다. 따라서 개혁주의는 이와 같은 역사성을 가지기 때문에 교회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개혁주의를 말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3. 성경에 가장 충실한 신학 전통
신학전통과 역사성은 다른 신학 전통도 동일하게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들만으로는 개혁주의와 다른 신학 전통을 구별할 수가 없다. 다른 신학과 구별되는 개혁신학의 특유성은 이 신학체계가 “성경에 가장 충실하다”는 것에 있다. 이 점은 몇 가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사전에 이런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이 명제는 개혁주의가 완전한 신학전통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학전통은 본질상 인간의 작업이기 때문에 결점을 지닐 수밖에 없으며 성경을 제외하고 완전무결한 신지식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는 교회 역사 가운데 출현한 가장 성경적인 신학 전통이라는 점은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이 명제는 개혁주의만이 참 신학전통이고 다른 신학들은 다 틀렸다든지 거짓 전통이라는 말을 뜻하지 않는다. 물론 로마 카톨릭과 같이 어떤 전통은 명백하게 성경과 상충할 정도로 성경에서 벗어났지만, 어떤 다른 전통들(예를 들면 루터파나 감리교회)은 성경에 상당히 충실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비록 이 전통들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 부족하고 연약한 점을 지니고 있지만, 개혁주의는 이들 교회를 거짓된 교회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경에 가장 충실하다는 것을 무엇을 뜻하는가? 사실 이것이야 말로 16세기와 17세기에 종교개혁에 있어서 가장 첨예한 논쟁이 되었던 부분이다. 이 논쟁을 오직성경(sola scriptura)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겠다. 어떻게 보면, 성경에 충실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신학전통이 세상에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다들 자신들이야 말로 성경에 가장 충실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경에 가장 충실한 것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에서 “성경에 가장 충실하다”는 말은 “성경대로 하자” 혹은 “말씀대로 살자”로 표현되고 있다. 이 말은 아주 좋은 말 같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아주 무책임한 말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강조해야 할 것은 “말씀대로 살자”는 말이 결코 성경에 있는 그대로 하자는 말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5000명을 먹였으니 우리도 5000명을 고쳐야 하는가?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렸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는가? 초대교회에서는 집에서 예배드렸으니 오늘날도 집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실제로 이와 비슷하게 생각한 그룹들이 있었다. 16세기 재세례파는 성경에 명시적인 말이 없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거부하였고, 오늘날 안식교는 성경에 토요일이 주일로 바뀌었다는 명시적 가르침이 없기 때문에 주일성수를 거부하였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보았을 때, 성경에 충실하다는 말은 성경 그대로 하자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 충실하다는 말은 결국 성경의 해석에 충실하다는 말이고, 올바른 성경해석은 단지 성경을 읽는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종교개혁 때까지만 하더라도 올바른 성경 해석은 교회의 전유물이었다. 사실상 성경 자체가 라틴어로 쓰여 있었기 때문에 일반 성도들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었다. 교권을 지닌 성직자들은 성경 해석에 대해서 독점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교황은 그 중에 최고의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성경에 대하여 여러 해석들이 충돌하게 되면, 그것에 대한 최종적 결정자는 사실상 교황이었고,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교황 무오설이라는 교리를 만들어 내었다. 재세례파가 성경에서 본질적인 가르침들을 제거하여 성경적 가르침에 충실하지 못하였다면, 로마교회는 성경에다 다른 가르침들을 첨가함으로써 성경적 가르침에서 벗어났다.

이들과 달리, 개혁주의는 성경에 명시적으로 표현된 가르침뿐만 아니라 성경에 암시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것도 성경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이들은 성경뿐만이 아니라 공의회의 결정, 초대교부들의 가르침, 교회의 전통, 심지어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도 매우 존중하였다. 로마 카톨릭과 달랐던 점은 개혁주의는 이것들을 모두 성경 보다 아래의 권위에 있으며, 따라서 성경에 의해 최종 판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가 ‘오직성경’을 주창한다고 해서 성경만 있으면 되고 다른 책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비개혁주의이다.

개혁주의가 오직성경을 이렇게 이해했기 때문에, 개혁주의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성경만 고집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전통과 이성, 그리고 경험도 효과적으로 사용하였고, 그 가르침들을 모아서 체계적으로 정리를 하여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이것이 바로 신앙고백서이다. 어떻게 보면 신앙고백서야 말로 개혁주의의 특성을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보여 준다 하겠다. 즉, 개혁주의의 핵심적 내용들은 다 이 고백 속에 적절하게 자리 잡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신앙고백 없이, 즉 아무 선입견 없이, 성경을 직접 읽는 것이야 말로 성경을 가장 올바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 역시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실천 불가능하며 교만한 주장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아무런 선입견 없이 백지 상태에서 성경을 읽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개혁주의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고백과 그것에 근거하여 발전한 신학체계에 따라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고 그것을 오늘의 삶 속에 적용시키는 신학전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혁주의 신앙고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다면,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개혁교회, 즉 성경에 충실한 참된 교회를 세우는 것도 불가능하다. 물론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부분적으로는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교회가 세워질 수 있겠지만, 교리와 신앙과 예배 및 삶에 있어서 통전적으로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교회의 건설은 가능하지 않다.


4. 공교회적(catholic) 특성을 가짐
마지막으로, 개혁주의는 성경에 가장 충실한 신학 전통이기 때문에 공교회적(catholic) 특성을 갖는다. 로마 교회가 ‘카톨릭’이라는 단어를 독점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단어를 잘 쓰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로마 교회가 쓴다고 해서 우리가 쓰지 않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실제로 우리는 매 예배시간 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만약 우리가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면 우리의 신학도 카톨릭적이어야 한다.

‘카톨릭’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분파’와 대비되는 ‘전체’라는 뜻이다. 개혁주의가 공교회적 신학전통이라는 말은 개혁주의가 가장 포괄적으로, 통전적으로, 풍성하게 성경을 이해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혁주의의 신앙고백은 16세기에 시작되어 17세기에 완숙함을 보여 주었지만, 이 신학전통은 종교개혁 시기에 처음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중세 스콜라 신학을 거쳐 초대교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뿐 아니라 마침내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개혁교회는 비록 범국가적으로 단일한 신앙고백서(The Book of Concord)를 채택한 루터파와는 달리, 국가별로 자신들의 고백서를 작성하면서도 서로간의 일치와 교제를 유지함으로 보다 풍성하고 다양한 신학 전통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 결과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받아들인 영미 장로교회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벨직 신앙고백서, 도르트 신경을 받아들인 대륙의 개혁교회는 본질상 동일한 신학전통을 유지하면서도 각자가 처한 역사적 상황 속에 훨씬 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개혁주의를 이렇게 할 때, 소위 ‘칼빈주의’라는 용어는 개혁신학의 전통을 지칭하기에 많이 부적절하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칼빈이 비록 개혁주의 전통에서 위대한 신학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는 위대한 개혁주의 신학자 중에 한 명이었을 뿐이다. 버미글리, 부써, 크랜머, 우르시누스 등과 같이 당대에도 그에 버금가는 위대한 신학자들이 존재하였을 뿐 아니라 이후에 시대에도 베자, 튜레틴, 퍼킨스, 에임스, 후치우스, 유니우스, 오웬, 하지, 바빙크 등과 같은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이 교회 역사속에 존재하였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개혁주의는 어느 한 사람의 신학으로 환원될 수 없다. 칼빈 자신도 자신만의 독특한 신학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이제까지 가르쳐온 공교회적 신학을 추구하였다는 사실만으로 칼빈주의는 개혁주의라는 말로 대치되어야 할 것이다.

개혁교회의 공교회적 특성은 미국 복음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한국 교회에서 특별히 강조되어야 한다. 비록 복음주의와 개혁주의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지만, 공교회성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통전성을 강조하는 개혁주의와는 달리, 복음주의는 분파적, 부분적, 일시적, 지역적, 비역사적, 편의적 특성을 너무나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그들은 구원론에 있어서 복음, 중생, 영혼구원, 전도, 선교, 교회 성장과 같은 특정 부분만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역사와 전통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부정적 경향을 보일 뿐 아니라 표면적으로는 성경을 강조하지만 신앙고백이 분명히 서 있지 않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에서 벗어나거나 부족한 경우가 많다.

물론 공교회적 신학은 아무 것이나 좋은 것이면 수용하는 ‘잡탕’ 신학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날 장로교회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그리고 자신들의 신학의 폭넓음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 교만 속에 온갖 인간적인 전통들이 스며들어와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점에서 개혁신학을 표방하는 고신교회는 이 공교회성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고 선포해야 할 사명을 가진다. 적어도 개혁신학을 표명하면서도 자기중심적 신학, 분파적 신학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신학적 경향에 대해서는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할 것이다.


결론

이제까지 정리한 것에 따르면 개혁주의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고백과 그것에 근거한 성경해석을 바탕으로 형성 및 발전되어 온 공교회적 신학 전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만약 개혁주의라면 올바른 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부터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이 굳건한 토대 위에 초대교회에서부터 종교개혁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거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유산들을 점차적으로 우리의 것으로 소화해야 할 것이다. 이런 작업들이 우리 고신 교회에 이루어 질 때, 우리 교회가 한반도 구석에 치우진 분파적 공동체가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는 공교회의 일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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