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69번째)- <제30장> 교회의 권징(1) 설교를 듣고.

10,107 2014.09.24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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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회중이 필요로 하는 것은 나 자신의 거룩이다.

- 로버트 맥체인

현대 교회의 모든 문제는 거룩의 실패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완전히 동일한 문제로 개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거룩을 조장하고자 하는 인간편의 생각으로 조작된 방법론이 횡횡합니다. 엄밀함보단 자유를 말하여, 이건 뭐 자유도 아니고 뭣도 아닌 스스로도 불편한 방종이 자라게 합니다. 되려 엄밀함 안에 자유다운 참 자유가 있는데 말입니다. 요즘 부쩍 교회공동체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아래 설교는 교회를 이루는 원리에 대해서이며, 하나님 편에서 합법적으로 제정하신 징계에 관한 설교입니다. 설교에서처럼, 교회 권징은 해를 주는데 있지 않고, 유익을 주는데 있으며, 거절하는데 있지 않고, 교정하는데 있으며, 쫓아내는데 있지 않고, 영혼을 회개시켜 교회 안으로 불러들이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권징은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제도입니다.

이 설교에서 인용된,
'볼찌어다 내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라는 주님의 엄위하고도 참소망이 되는 말씀이, 설교 전체를 통해 울리는 것 같습니다.

정말 주께서 그 열쇠를 쥐신 분이므로,
거룩함으로 다가서기 위해 함께 전투하는 교회되길 원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타이핑하였습니다. 시기 적절한 귀한 내용을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설교를 너무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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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4. 27(주일)

현산교회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69번째)- <제30장> 교회의 권징(1) / 최덕수 목사님.

(설교 전문)

요즘 교회들을 바라보실 때에 어떤 느낌을 갖으십니까? 이전보다는 더 화려하게 지어진 교회당이 있고, 이전에는 없던 기독교 방송도 생기고, 요즘에는 TV방송국까지 생겼습니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교회가 풍족하고, 아무런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헌금도 얼마나 많이 들어오는지요. 큰 교회들은 한주간에 수천만원이 들어오는 그런 교회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근데 이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교회가 풍족하게 보이면서도, 교회가 이상하게도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어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교회의 비리를 지적하는 그런 보도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교회가 참 작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로 부터 칭송을 받았던 교회가 바로 한국교회였습니다.

왜 이처럼 교회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는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교회가 가져야 할 '거룩함'을 상실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 입니다. 로버트 맥체인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워낙 이 문구가 좋아서 여기 적어놓았습니다.
'나의 회중이 필요로 하는 것은 나 자신의 거룩이다.'

좋은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목회자 자신의 거룩이라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성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거룩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서 교회와 신자가 거룩함을 잃어버리면 세상에 짓밟힐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가?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오늘 우리가 살펴 볼 주제인 '권징'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 주제를 다루면서, 제 개인적으로도 마음이 좀 무거웠습니다. 과연, 우리 교회는 권징을 제대로 실시하고 있는가? 그런 반성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참 교회의 표지로 신실한 말씀의 전파와 또 신실한 성례집행, 이 두가지를 이야기했고, 이것에 또 하나를 보태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정당한 권징의 시행입니다. 그래서 벨직 신앙고백서를 보면, 29장에 이 3가지 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 종교개혁자들은 신실한 말씀의 전파와 신실한 성례 집행에 '정당한 권징의 시행'을 덧붙혀 놓았을까요?
그것은 권징이 없이는 말씀과 성례가 조롱거리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부모나 교사가 아이를 도무지 징계하지 않고,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는다면, 자녀는 부모나 교사의 가르침을 업신여길 것입니다. 이처럼, 권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으면, 말씀이 권위있게 전파될 수 없고, 성례가 제대로 시행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은 받아도 그만, 안받아도 그만, 성례에 참여해도 그만, 안참여해도 그만, 그냥 그런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권징의 수행은 참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오늘 이 주제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이 주제를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 권징이 무엇인지 알아야겠습니다.
영적으로 미성숙해서 권징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권징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권징 중에 경계, 권면, 수찬정지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수찬정지에 담겨있는 영적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수찬정지가 그 사람에게 권징의 효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단지, 예배시간에 간혹 먹을 수 있는 간식거리를 빼앗는 정도 밖에 아무 의미가 없는 그런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권징을 제대로 실시하기 전에 우선 신자들에게 권징을 제대로 시행할만한 그런 지식과 체력을 기르도록 하는 일에 힘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야단치는데, 지금 부모가 야단을 치는지, 자신을 어르고 달래고 있는지 도무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한다고 하면 그 야단은 그 아이에게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돌도 안된 아이에게 채찍을 휘두른다고해서 교정되지 않는 것처럼, 영적으로 미성숙한 신자들에게 권징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먼저 권징을 실시하기에 앞서서, 교회는 권징이 무엇인지, 교회가 어떻게 서가야 하는지, 교회다움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징이 제대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 성숙한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야 하고, 교회의 거룩함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을만한,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죄와 맞써 싸울만한 그런 건강한 신자들이 교회 안에 많이 서 있어야 이 권징이 제대로 시행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안타까운 점은 이런 성숙한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일이 일어나지요?
권징을 하면 다른 교회로 가버리고, 권징을 하면 다른 노회로 옮겨 가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어떤 상황에 비유될 수 있는가? 제가 지난 수요일날 새가족 성경공부 때 말씀드렸지요? 한국교회의 상황은 무엇과 같은가? 시간이 지나도.. 학년은 올라가지 않고, 반만 바뀌는 상황에 비유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장과 성숙이 없는 그저 교회 조금 열심을 내고, 봉사 직분 한두가지 정도 가져서, 그저 봉사하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권징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교회에서 권징의 효력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뭔지, 구원이 뭔지, 권징이 뭔지를 제대로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권징을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대게 권징하면, 목사와 장로로 이루어진 당회에서 시행하는 벌. 이걸 가르켜서 권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선 이 권징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인 신자 상호간에 되어질 어떤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틈이 있는대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린 적이 있지요. 교인들은 적어도 서로 돌아보고, 가르치고, 또 죄를 범하면 그 죄를 지적하고, 그 죄를 지적당한 사람은 회개하는 이런 정도의 돌보고 가르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성도의 교통이 이뤄질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려 왔습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을 보시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며..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각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게 되면, 성도 한사람 한사람의 영적인 형편과 실상을 잘 파악하고 그에 적절한 말씀으로 위로하고 권면하고 경책할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에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서로 격려하라 고 그랬지요. 그래서 성경에는 서로 위로하라 용서하라 권면하라 그런 말씀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신자 상호간에 이런 권면과 위로와 경책이 많이 생겨나면, 사실은 당회에서 권징할 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당회가 모여서 어느 특정한 사람을 권징할 필요가 없는 그런 교회가 사실은 제일 이상적인 교회라 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상교회에는 권징을 시행해야 할 일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지요? 실족케하는 일이 없을 수 없다. 고. 실족케하는 그런 죄는 매우 심각한 죄인데도 안타깝게도 실족시키는 일이 일어난다고 말씀했는데, 권징을 하지 않으면 참 좋겠지만, 지상교회엔 권징을 할 수 밖에 없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모든 범죄가 다 권징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소 사소한 잘못을 범했는데도 당회가 다 모이는 일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엔 그저 온유한 마음으로 서로 조언하고 권면하는 그런 정도로 족한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 안에 심각한 범죄 사건이 발생하는 그런 경우입니다. 이 때는 교회가 그냥 있어서는 안되고, 성경이 원하는 원칙을 따라서 권징을 시행해야 하는 것이지요. 고린도교회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은, 아비의 아내 즉 계모와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는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사도 바울이 권징을 실시하지 않는 고린도교회의 죄를 책망하면서, 그 죄를 통한히 여기지 않는 것에 대해서 책망을 하면서 그 사람을 출교할 것을 명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런 심각한 사건이 일어났어도 교회가 권징을 시행하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권징을 반대합니다.
어떻게 반대하지요?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누가 누구를 쫓아 낼 수 있단말인가? 다~ 같은 죄인인데, 그저 사랑으로 받아주고 용납하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이 되면, 권징을 시행하려고 하면 권징을 시행하는 사람은 상당히 엄격하고 딱딱한 사람이 되고말고, 그저 받아들이고 용납하자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풍성하게 체험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이상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들 빌클린턴 대통령의 성 스캔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국회 청문회가 열렸지요. 그래서 탄핵 안이 발휘되는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 때, 탄핵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의원들의 핵심 주장은 '우리도 죄인인데 누가 누구를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종종 인용하는 성경 구절이 뭔가, '비판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헤아림으로 똑같이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는 바로 그 말씀이지요. 그런데, 이 말씀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자체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을 분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에 대해 아무런 평가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이웃과 형제를 판단할 때, 자비로움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연약하고 허물많은 우리에게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형제들을 그런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실 때, 자비로움을 거두시면,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의 면전 앞에 설 수 있습니까? 살아남을 수 가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 대하시는 것처럼 그런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판단하는 그 자체를 가지고 성경은 정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만약 어떤 신자가 주님의 말씀을 오해해서 교회가 권징을 시행해서는 안된다 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권징이라는 정당한 수단을 통해서 교회를 성결케하시려는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본인은 교회를 위한다고 그러고, 그 사람의 처지를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교회의 거룩함을 흐트리는 그런 심각한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꾸 이야기하지요. 다 같은 죄인인데, 누가 누구를 정죄하느냐. 우리 주님께서도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지 않으셨느냐? 우리 중에 죄 없는자 있느냐? 그러면서 이렇게 판단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특별히 권징에 대해서 손을 들면서 반대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연약함을 생각하면 우리 중에 나는 권징을 받을 만한 일을 전혀 한 적도 없고, 나는 다른 사람들을 권징해야할 만한 그런 권한이 있다고 할 사람이 사실은 한사람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말하기를, 교회는 범죄사건이 일어났을 때, 반드시 권징을 시행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요? 고린도 교회에 음행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권징에 대해서 권면하였습니다. 뭐라고 권면했는가?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어떻하라는 것인가요? 판단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 합니다. 성도의 교제 중에서 내쫓으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자꾸 사랑을 이야기 하지요.
품어주고 용납하라 하지 않았느냐?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제가 한번 물어볼까요?
사랑은 아무때나 누가 자기 마음대로 하도록 내어버려두는 것이 사랑입니까? 여러분들 자녀를 사랑하는데, 자녀가 도박을하고, 나쁜 것을 보고, 자녀가 부모의 말씀을 거스리고 하는데, 그냥 가만히 두고 보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과 징계는 절대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버린 자라' 했습니다. 그는 내놓은 자식이라 이런 말이지요. 그러므로, 사랑에 대한 왜곡된 생각 때문에 권징을 부정적으로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권징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제도지요. 마태복음 18장 15절부터 20절에 너무나도 명백히 잘 나와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일단 제가 다음주일에 다시 자세하게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이런 주님께서 제정하신 원칙을 따라서, 고린도교회의 어떤 범죄 사건에 대해 이런방식으로 처리할 것을 권면하는 것을 우리가 고린도전서에서, 후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이라든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 때문에, 권징을 무조건 반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한번 더 말씀드리지만, 권징이란 수단을 통해서 교회를 거룩케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리에 있게 되는 심각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권징을 왜 실시합니까?
교회 안에서 권징을 실시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합당한 영예, 합당한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 통치자이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해야만하는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는 단체가 바로 교회 공동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말이나 행위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인하는 이런 일들을 하게 될 때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런 사람들을 용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인하는 일이 발생함에도 권징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게 되는 그런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7장을 보면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아간이 범죄했는데, 물론 그 사실을 알지 못하긴 했지만, 그 사실이 드러나지 않게 되자,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죄문제가 척결되지 않고서는, 주님께서 제정하신 권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서는, 주님께서 함께하실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권징은 두가지 역할을 합니다.
첫째는 교인들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일궈가도록 격려하고, 나아가서 교인들의 잘못을 교정하는 그런 역할을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법이 올바로 시행되도록 하고 특별한 범죄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때라 할지라도,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할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권징입니다. 세상의 법도, 저희가 구치소에 갈 일이나 그런 일은 별로 없지만, 그 법이 있느냐 없느냐는 천지차이인 것입니다. 그런 법을 우리가 염두해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어느정도 죄성을 통제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권징에 대한 선입견을 우선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권징은 벌주고 벌 받는 것이 아닙니다. 권징은 형벌이 아니예요.
권징은 회개하지 아니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세상 법은, 제가 회개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러면, 사람 죽여도 놔둡니까? 아니지요. 회개해도, 정당하게 형을 살아야 하고 벌금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죄를 범해도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가 시행하는 권징은 교정을 위한 징계이지, 형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 권징은 해를 주는데 있지 않고, 유익을 주는데 있으며, 거절하는데 있지 않고, 교정하는데 있으며, 쫓아내는데 있지 않고, 영혼을 회개시켜 교회 안으로 불러들이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징은 영적 치유의 중요한 수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권징에는 우리 모두가 함께 참여해야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형제가 일컫는자가 음행하고 탐남하고 우상숭배하고 죄를 짓고 하는데, 이런 자들과 함께 먹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가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는 이유 중에, 죄를 범하는 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범죄자를 내어 쫓지 아니한 그 사실 때문에, 편지를 썼습니다.

특별히, 사도바울은 죄를 범한 사람을 내어쫓으라고 이야기했지만, 그 결정은 자기에게 있지 않고, 고린도 교회 전체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2장에 보시면, 결국 권징을 했고, 이제 벌을 해제할 그런 때가 되었음을 말하면서,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 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죠? 권징은 당회가 수행하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권징은 교회의 신자 모두가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버림 받은 것이 족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경의 원칙에 따라서, 이런 올바른 권징을 시행하게 될 때, 교회는 하늘로 부터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정말 올바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면에서 권징을 제대로 실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 사람 자꾸 모으는데 급급하고, 조금 상처 받고, 조금 어려운 사람들을 쓰다듬는 그런 일에 다 마음을 쏟는데, 교회 안에 일어난 심각한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아무도 말하지 않고, 그저 사랑으로 용납하고 헤아려주어야 한다고 하면, 우리 교회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교회가 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주제지요.

따라서, 교회가 권징을 시행해야 되는데, 구체적으로 권징을 시행하는 절차 가운데 당회가 그 핵심에 있게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0장 2항에 그 사실이 나타나고 있지요? 하나님은 교회에 목사, 장로와 같은 직분을 주셨고, 이런 직분자들을 통해서 일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실까요? 왜 교회 직원을 통해서 일하실까요?
겸손을 훈련시키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과정으로 인간의 교만된 마음을 꺾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은사를 고루 다 분배하여서 서로 돕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직분자를 세우는 것이요, 또 모든 성도들은 직분자를 존중해야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 말씀을 가르치는 교역자들에게 여러분들은 존경을 표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인격 자체가 뭐 훌륭해서 그런게 아니고, 교역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5장 17절에서, 잘 다스리는 자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특별히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자들을 더 존경하라는 것이지요.

그럼, 교역자들이라고 해서 교회를 맘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제가, 장로님이 저희 교회를 마음대로 쥐고 흔드나요? 1항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교회 직원들에게 교회 정치를 맡기셨다고 되어있습니다. 여러분들 정치 좋아하십니까? 본래 정치 자체가 나쁘고 악한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도 국가처럼 정치를 해야합니다. 여러분들 정치해야한다는 말을 나쁘게만 듣지 마십시오. 그냥 내어버려두면 안되는 것이고, 되는대로 놔두고 사람들이 하고자 하는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장로 정치를 따라서 정치를 하는 것입니다. 본래, 국회위원들이 마음대로 정치하는게 아니라 헌법에 명시된 내용을 가지고 그 원리를 따라 판단하고 정치하는게 맞는 것이지요. 교회도 장로 정치를 따라서 교회를 다스립니다.

그래서 다스림을 위한 체계가 뭐냐? 하면 그것은 성경이요. 교회 헌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장로들을 통해서, 다스리는 장로들을 통해서 교회를 치리해 온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을 통해서, 천부장이나 백부장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돌아 봤지요. 신약교회는 어떻습니까? 이런 직분자들을 통해서 교회를 돌아 봤습니다. 특별히 장로를 통해서 교회를 돌아 봤습니다. 에베소 장로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했지요. '성령이 감독자 삼은 장로들이라' 교회 장로들을 뭐라고 불렀다고요? '성령이 감독자로 삼은 교회 장로라' 또 사도 베드로는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나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라'고 우리에게 권면했습니다.

장로정치는 감독 한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그런 감독정치와 다릅니다. 감독정치의 표본이 로마 카톨릭이지요. 주교, 교황 그 한사람이 다스리지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 개혁교단에서는 노회장이라고 부르지 않고(요즘에는 노회장이라고 부르는데..), 옛날에는 노회 장을 쓰지 못하고, 노회 의장, 총회 의장. 다시말해서 노회장은 노회를 대표하는 사람도 아니요, 총회장은 총회를 대표하는 사람이 아니라, 총회와 노회로 모였을때, 의장 역할만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사회 역할만 한다는것이지요.

개혁교회가 얼마나 명칭 문제도 민감한지요. 이런 모든 부분들을 헤아리다 보니까, 하나하나 엄격하게 따지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장로 정치는 회중 한사람 한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그런 회중 교회와도 다릅니다. 회중 교회는 쉽게 말하면, 민주주의 제도 같습니다. 표 많이 내면, 그 쪽으로 되는 것이고, 사람들이 선호하는 의견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게 회중 정치입니다. 장로 정치는 성경에 입각해서, 장로들의 모임. 쉽게 말해서 집단 지도체제이지요. 목회자와 장로들로 구성된 당회를 통해서, 교회를 다스리는 것. 이것이 바로 장로교회인 것이지요.

우리 한국교회는 교단 개념이 별로 없어서, 그저 어디로 이사가서 가까운데 있으면, 아무데나 가니, 본인의 신앙의 뿌리와 관계 없지요. 그런데 적어도 서구 유럽교회나 캐나다나 미국교회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본인이 장로교회에서 자랐으면, 반드시 장로교회를 다닙니다. 물론, 제가 교단주의가 꼭 성경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장로교회는 집단 지도체제로 목사와 장로로 다스림을 이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웨민 신앙고백서 2항에 보시면, 교회 직원들에게 천국의 열쇠가 주어졌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 직원들이 천국문을 마음대로 열고 닫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하기가 쉬운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시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신앙고백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 고 대답했지요. 그랬을 때, 뭐라고 다시 하셨습니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고'
이 부분을 해석하는데는 항상 두가지 극단이 있어 왔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와, 곧 교황과 그 후계자들이 매고 푸는 권세를 받았다는 근거구절이라고 이야기하지요? 이것은 사실 논박할 가치가 없고, 여러번 말씀 드렸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 제가 말씀 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로 극단적인 견해는, 이 말씀은 실제로 교회 직원들에게 어떤 권세를 맡긴 그런 내용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오늘 오전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권세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볼찌어다 내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천국문은 실제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열려지고 닫혀지는 것입니다. 다만, 그 열쇠를 관리할 수 있는 관리권을 교회 직원에게 위탁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직원들은 이 열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권징과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고 실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충실하게 말씀을 전하고, 교회가 권징을 충실하게 시행하게 될 때, 믿고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실제로 천국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 반대로, 제대로 말씀을 전파하지 않고, 그래서 구원의 도리를 제대로 전파하지 않고, 믿음의 도리를 제대로 전파하지 않고, 율법주의를 가르치고, 외식주의를 가르치면서 이렇게 믿으면서 천국간다고 하면 이것은 바로 천국문을 닫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권징을 제대로 시행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교회와 함께 할 수 없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말씀과 권징을 시행해야하는 주관처라 할 수 있는 당회는 얼마나 중요한지요. 개혁교회는 예배든지 성례든지, 말씀을 전하는 일이든지 권징하는 일이든지 얼마나 신중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형식을 갖추는 것은 단순히 형식주의가 아니고,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권징과 성례를 매우 귀중히 여긴다고하는 표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해서, 형식 필요없다. 그래서 찬양 몇곡하다가 말씀 전하고, 그저 기도하고 마치는 이런 식의 예배.. 사람들이 좋아하지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때나 되는대로, 질서도 없이, 성경의 원리도 따르지 않고, 그저 마음의 충동에 따라 예배드리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조금 저속한 표현으로) 열받아서, 자신들이 정서가 고양되서 예배드린다고 한 것에 불과할 뿐,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그런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과 권징은 두가지 따로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둘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권징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으면서, 말씀을 제대로 전파 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제대로 전파하지 않으면서, 권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전파해야 권징도 제대로 실시할 수 있고, 권징을 제대로 실시해야 말씀을 제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어느 날 갑자기 잘못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씩 조금씩, 문을 열어주게 되고, 교회 안에 권징해야할 일이 있음에도 그냥 봐주고 봐주고 하다 보니까, 교회 안에 있는 죄가 지도자들에게도 옮겨가게 되고, 결국 교인들 중에 심각한 죄를 범했을 때 권징하게 되면, 뭐라고 달려듭니까? '아니, 목사님도, 장로님도 잘못했을때는 권징하지 않더니만, 왜 우리가 잘못했을땐 권징합니까?' 이러다 보니, 권징이 사라진 현대교회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어릴 때, 주일에 빨래하는 것으로 권징받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주일날 마음대로 돈쓰고, 돌아다녀도 권징합니까? 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당회는 불러서 권면합니다. 그렇게 거룩함을 이루려고 애써왔기에 한국교회가 과거에 부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왜 한국 교회가 부흥하지 못합니까?

권징을 도무지 시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인 저의 안타까움입니다..

교회를 이룬다 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인가..
저는 참 교회를 이룬다는 것은 예배로 모이고, 여전도회 있고, 유초등부있고, 중고등부 있으면, 교회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 직원이 충실하게 말씀을 전하지 않거나, 권징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그들이 가지고 있다는 천국 열쇠는 아무 의미없는 일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주제를 참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권징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 권징의 이유는 교회가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입니다.

여러분들 자녀가 잘못했을때, 그냥 넘어가세요?
그냥 밥먹고 등 두드려주고 그러신가요?

국회위원도 잘못을 하면 단기위원회나 윤리위원회가 소집되어 그 사람을 제명하거나 탈당조치를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세상도 이렇게 하는데, 교회라고 하면서 죄를 범했는데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권징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그런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교회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에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기를 바라십니까?
주의 영이 역동적으로 우리 가운데 활발하게 역사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권징을 시행하지 않아야 하고, 권징을 시행할 때 거부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떠나시는 모습은 우리의 육안으로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떠나시는 일이 우리 눈으로 확인이 됩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든지, 그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면서 찬양하고.. 두세사람 모였으니 함께 하신다는 거지요.
하나님이, 우리가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데, 함께 하십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든지 우리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생각은 착각인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그렇습니다.

왜! 제 안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지 않는가?!
왜! 하나님의 교회 안에 거룩의 영이 역사하지 않는가?!
왜! 말씀이 전파되는데 성도들이 회개하지 않는가?!
왜! 복음이 전파되는데 눈물로 회개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

심각하게 생각해보니, 거룩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의 서고 넘어짐은 바로 이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거룩하지 못하고 권징을 시행하는 이런 일에 게으르게 되면, 그리스도의 복이 멈추게 되고, 그런 상태가 계속되면, 주님의 임재와 영적인 활력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맞물려 있어요. 유기체이기 때문에.

제가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성도 한두사람이 죄를 범하면 우리 모두가 그런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점차 사교모임화 되는 것입니다. 예배로 모이고 활동이 있고 그런데.. 뭐 그 안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역사하신다는 흔적을 볼 수 없는 그런 교회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교회 부흥운동을 연구한 교회사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교회가 권징을 제대로 실시할 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났다고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간을 색출해내어서, 그 가정을 돌로 쳐 죽었을 때, 아이성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과 같은 그런 일들이 교회 안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인 저 개인의 힘과 역량으로 이런 일은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제가 아무리 이런 내용을 이야기하고, 이런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이야기해도 대다수가 그렇지 않다라고 하면, 저도 함께 그런 쪽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무슨 독불장군이 아니거든요. 제가 교회를 사임하지 아니하지 않는 한 그렇습니다.

우리가 왜 모였습니까?
좀 더 키워서, 세를 확장해서 우리교회의 교회됨을 더 증거하려고 모인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이 제 목회의 목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우리가 어디에다 초점을 맞춰야 할까요?
어떻게하면 교회가 바로 서 갈 수 있는가?
어떻게하면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하면 거룩한 교회가 될 수 있는가?

거기에 온 마음을 쏟고, 조금이라도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죄가 스며들까 늘 살피면서, 긴장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살고 그렇게 교회를 섬기게 될 때, 그 교회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저나 장로님 당회를 존중해주시고, 존경해주시고, 주장하는 자세로 우리 고집대로 우리의 성향에 따라, 우리의 형편에 따라 하지 말고, 주님이 뭘 원하시는가, 우리게 요구하시는게 무엇인가를 늘 생각하면서 그런 교회를 우리 평생에 이뤄갔으면 하는 마음이 제 마음 가운데 가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희가 교회 권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거룩함을 상실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숫자는 늘어간다지만, 실제로는 많은 교회의 사람들이 모여들 뿐, 오히려 교회의 숫자는 점점 적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카톨릭과 이방종교를 따라 가는 가운데 있습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점점 허물어져가고 있고, 목회자가 소유해야 할 거룩함은 점점 사라져가는,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임재하시고 다스리시는 그런 교회가 과연 몇이나 될까 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 우리가 속해 있습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회개운동이 일어나게 하시고, 영적부흥과 각성이 다시 한번 더 일어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권징의 수단은 하나님의 교회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참으로 중요하고 요긴한 수단인 것을 알게 하셔서, 주의 말씀을 잘못 오해하여 모든 것을 다 덮어주고 그냥 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는, 그런 어긋난 생각을 갖지 않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정당한 수단을 쫓아서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이뤄가는, 그리하여 주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그런 교회의 모습을 이루는 현산교회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댓글목록

차선미님의 댓글

주님 우리를 도우소서~

이연경님의 댓글

와~~ 감사합니다!!  이렇게 글로 읽으니 다시한번 새기게 되어 너무 좋네요.. 종종 부탁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