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01. 19 주일,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

9,479 2014.11.21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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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말씀에 기억나는 한마디를 꼽자면, 제겐 '기억하라' 였습니다. 매일 모자란 모습 뿐이지만, 하나님을 기억할 때 마음이 견딜만하고 편안해집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신명기 1장 말씀을 다시 보았습니다. 아래 말씀을 기억하며, 예전 설교를 다시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귀한 말씀 나눕니다.


28절
우리가 어디로 가랴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2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30절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1절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오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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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1. 19 주일
현산교회 주일 낮 예배
신명기 1:41~46
-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

(배경설명)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취하라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유형인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내어 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내신 것은 아모리 족속의 사람들의 손에 죽도록 하시기 위해서'라고 하나님의 의도를 곡해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민수기를 보면 군대 장관을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우 진노하셨고, 여호수아와 갈렙 이외에는 다 광야에서 떨어지게 될 것인데 그 기간을 40년이었습니다. 그러나 너희의 자녀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광야로 들어가라'는 조처를 내리셨는데,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의 조처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오늘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홍해길로 가서 광야로 들어가라 는 말은 과거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신세가 되었다는 뜻이지요. 시간은 지났지만, 삶에 진보가 없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아는 자 답게 우리의 신앙생활의 여정 가운데 마땅히 거쳐가고 지나가야 할 그런 길들을 따라 살아가야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곳까지 가지 못하고 도리어 뒤로 밀리고 마는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매우 진노하시고, 하나님께서는 홍해길로 들어가서 다시 광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조처에는 두가지 의도가 있었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에 대한 징계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2. 둘째는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교정하고 훈련하기 위함입니다.

가나안 땅은 그냥 들어갈 수 있는 빈 땅이 아니라, 가나안 백성들이 필사적으로 항전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그런 땅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을 전쟁을 통해 취해야 하는 이러한 모습은, 신약시대에 백성들이 구원받고 난 다음에 세상과 마귀와 또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세력들을 몰아내야 되는 이 일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전쟁의 원형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지만, 그 전쟁의 모형을 보여주는 사건이 가나안 원주민들을 쫓아내는 그 사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모두 아는 바대로 우리 안에 죄성을 몰아내고 살아가는 일은 우리 안에 의지로 결단코 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과 성령의 은혜를 덧입지 아니하면 어느 것 하나라도 우리는 죄의 세력을 몰아낼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상태로 가나안에 들어갔다가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과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가나안 족속들을 지속적으로 쫓아낼 수 있는 군사로서 훈련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하도록 조처를 취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움과 동시에 어그러진 그들의 마음을 교정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광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문제제기 #1)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의 조처에 겸손함으로 반응하면 되었지요..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징계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원리를 잘 알았던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고백록'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 하나님, 하나님의 법에 근거한 훈련은 자유의 과도함과 방종을 제안하도록 주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제한 속에는 학교 교장의 매로 부터 순교의 실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훈육은 우리에게 유익한 고통에 참여하게 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처음에 우리를 하나님께로 부터 도망치게 한 무익하고 유해한 즐거움과 쾌락에서 돌이켜 당신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불러 들이게 해줍니다.'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의 징계에 긍정적 효과를 잘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의도를 따라 그들을 다시 광야로 들여보냈다고 한다면, 그들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교정과 훈련의 채찍을 맞아야만 됐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리석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올라가서..'

원어 성경에는,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가 올라가겠습니다.'로 되어 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근데 가나안 땅에 올라가겠습니다.'라고 반응한 것입니다. 이것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이런 행동은, 믿음도 아니고 용기도 아닙니다. 이것은 만용이고 객기입니다. 이런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다루시는 방법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들은 그러한 경향성을 일찍이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 때부터, 불순종과 원망으로 일관해왔고 이제 가나안 땅을 상속받을 절호의 기회를 주었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모리 족속의 손에 죽이시려고 애굽에서 이끌어내셨다라고 원망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께서 채찍을 드시자, 뒤늦게 가나안으로 올라가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업으시고 안으시며 가데스 바네아까지 인도해내셨습니다. 이사야서의 기록도 백성들을 안으시고 자기 아래에 들이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기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에 믿음으로 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벨론의 이방신들은 도리어 백성들이 안고 뛰어야 했습니다. 세상 신들은 우리가 안고 가야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전쟁을 하다가 패하면, 우상을 내버리고 도망을 칩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상은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음에 위로를 줄지는 모르지만, 실상 우리의 문제 해결에 주체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고 가야 하는 신이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를 안으시고 업으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참 좋으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까.
답은 너무나 자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정적 순간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가데스 바네아로 오기까지, 갈길, 잘 곳, 전쟁 준비까지 모두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하신 하나님께 그들은 불순종 했고 하나님께서 징계의 채찍을 내리시자,

그 때, 마치 하나님은 속이 없는 분인 것처럼..
'제가 죄지었습니다. 올라가겠습니다.'라고 반응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종으로 다루겠다고 한 것입니다.
십계명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나는 너를 종되었던 애굽땅에서 인도해낸 여호와라.
내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다. 너희는 종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일 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뜻을 수종들도록 강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막무가내식의 믿음도 아닌 믿음을 발휘했던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때 늦은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순종은 즉시 해야하는 것이지요.

(문제 제기 #2)
인생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이루려 합니다. 지금 백성들은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바른 이해는 없고, 가나안 땅을 자신들의 땅으로 취해야겠다는 욕심만 있었고, 하나님과 자신들과의 관계가 틀어진 것을 교정하려는 그런 일에 우선순위를 두기 보다, 가나안 땅에 올라가는데 하나님이 힘을 보태달라는 이것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을 그 일에 개입시킨 것입니다.

이게 믿음이냐하면,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게 우리의 신앙생활의 상태나 처지, 하나님 앞에서 바로 보여달라고 하는 이런 기도는 별로 하지 않습니다. 제가 오늘 저녁 설교에서도 바울의 기도(옮긴이 : 저는 들었습니다.. 정말 강추합니다..ㅜ)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지만, 이런 신령한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담요 싸들고, 기도원 올라가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내용이라는게 보통 뭡니까? '불치병에 걸리면, 고쳐달라.. 사업의 길이 막히면 열어달라.. 자녀 좋은 대학 들여보내달라..' 이것은 성경이 요구하는 신앙생활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라. 나는 너희 중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죄로인한 우리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본론 #1)
그렇다면 하나님의 징계를 올바로 받아야 하지요.
그런다음에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 맞습니다.
백성들은 이 과정을 아주 짧게 지나갔습니다.
'우리가 죄지었습니다. 우리가 올라가겠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에 대한 징계는,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받겠습니다. 하는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과도하게 징계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에 우리 자신을 얼마든지 내어 맡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들과 달리 자녀들의 연약함을 고려하여 징계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께 백성들은
'저 매 안맞겠습니다. 그런데, 저 이거 하고 싶으니 편들어 주세요' 이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문제해결에만 초점을 맞추고 이것을 해결해 달라고만 요구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엄위한 징계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무기로 싸움에 뛰어드는 주제 넘는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죠?
아모리 족속에게 내쫓겼는데 어디까지 도망을 갔는가 하면, 호르마까지 도망을 갔습니다. (호르마, 멸망에 바쳐졌다) 가나안 족속을 멸망시켜야 하는데 자신들이 도리어 멸망당할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막무가내식의 믿음은 반드시 또다른 매를 불러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일을 했습니까?
자기 방식대로 잘못을 만회해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배경이 되는 사건은 민수기 14장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명기에는 잘 나타고 있지 않지만, 민수기에는 모세가 백성의 죄사함을 위해 간구하였고 하나님께서 내 백성들의 죄를 사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0년 광야생활은 이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우리편에서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용서를 하셨으면 됐지, 왜 용서를 하시고 난 다음에 40년이나 광야생활을 하게 하셨는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가혹하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계신 바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시내산에서 금송아지 우상숭배죄를 지었고.. 하나님께서 그 때 이미 이 민족을 다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모세가 그 결렬된 틈에 들어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의 은혜를 간구했고, 그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보응할 날에 보응하겠다'고 보응을 유보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또다시 하나님 앞에서 반역을 행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구속의도와 목적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거듭된 반역에 대해 이미 보응을 유보하신 하나님께서 광야생활의 조처를 내리신 것을 과도하다고 해석할 수 없습니다.

(본론 #2)
'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이러한 경고를 하셨음에도, 경고를 무시하고 가나안에 올라간 백성들.
하나님과 무관한 결정을 자기 마음대로 내려 놓고, 하나님은 제 편 들어주십시오라고 강요한 것입니다. 이런 무지한 일들은 역사 가운데서도 자주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무엘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 싸우고 4천명이나 되는 사상자를 내고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전쟁에서 졌다는 것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몸에 병이나서 증상이 있으면, 뭐가 문제인지 살펴봐야하지요.. 그런데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실로에 있는 언약궤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다시 전쟁했다가 3만명이나 되는 사상자를 내고 더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욕심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개입하시는 무지한 분이 아니십니다.

어리석은 일들은요.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일들을 자기가 계획하고, 그 계획한 것에 하나님이 들어오시도록 의도했다가 하나님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시지 않음으로 인해, 자기 스스로 실족해버리고 교회를 떠나 버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지한 일입니다. 언제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했습니까?

본문의 상황은 이런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모세는 40년 전의 이 상황을 회고하면서,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 교훈하기 위해서, 40년이 지난 지금 모압 평지에서 재차 이 사실들을 소급해서 백성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김의 하나님이시지요.

그러나, 때로는 우리에게 '참된 이김'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패배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훈계와 하나님의 채찍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더 무거운 채찍으로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거스를 때, 왕이신 하나님보다 자신들의 손에 들린 무기를 신뢰할 때 징계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으로 내 인생 살아 갈 수 있어. 라고 말하는 무기가 무엇입니까? 언약백성은 절대로 그런 것으로 인생을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패배를 주실 것입니다. 인생에게 톡톡히 깨달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순종하는 방식보다 자신의 뜻과 계획에 하나님을 개입시키는 이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를 범하게 될 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편을 드시는 분이 아니라, 적으로 돌변하십니다.

그 예들이 선지서에 많이 나옵니다.
왜 여리고 성 전투는 이기고,
왜 아이 성 전투는 졌습니까?
조건이 바뀌었나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적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왜 애굽의 종되었던 곳에서 인도해내신 분이,
왜 바벨론의 종이 되도록 만드셨습니까?
"언약 백성" 다운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에 대해 신중하게 회개하는 자세와 태도를 보이기보다, 상황과 형편을 빨리 바꾸어,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못을 인정하였지만,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다고 제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가 죄를 지었습니가. 저희가 가나안 땅에 올라가겠습니다.' 라고 말하였을 때, 이것이 진정한 회개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반응하셨겠지요. '그래 너희와 함께하니 올라가라'고 하셨겠지요.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고 하셨지요. 이것은 겉으로 회개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회개가 아님을 알리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그들은 무지하게,
자기 일에 편들어 달라고 강요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합니다.
그저 부르짖으라.
주께서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뭐 이런 식의 말로 충동질하는데.. 그것은 상황과 형편에 맞게 해야할 말입니다.
가시가 박혀 있으면 뽑아내야 하고
병을 앓고 있으면 고쳐야 합니다.
그 다음에 복귀해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번 말씀을 드리지만, 구원에도 진행과정이 있습니다.
일부터 세어야 백까지 갑니다. 일부터 바로 백으로 뛸 수 없어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지점에 머물게 하시고..
많은 고통과 어려움에 머물게 하시면..
돌아봐야 하지요..
그런데, 그런 일은 하지 않고 이생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하나님께 편들어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일을 여러번 반복하고 있는 분들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범한 죄는 신중하게 돌아보지 않고 진정한 회개도 없이 입술로만 잘못을 구하는 이런 것, 그리고 내가 어떤 일을 하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내 편을 들어주실 거라고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는 그런 것은..
마치 비오는 날에 불을 피우는 것입니다.
절대로 불은 피워지지 않고 연기만 납니다.
눈만 맵지요..
여러분들 왜 여기 앉아 계십니까?
아주 지루한 시간 잠을 쫓으면서 왜 앉아 계십니까?
하고 싶은것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내 영혼의 곤고함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이런 내용을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잘 살펴서 자신의 영적 실상을 하나님께 토로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해결의 가장 중요한 해결책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그런 곤고함 속에 두시는데, 그것을 내팽겨치고 자기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하니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대패를 하고 그제서야 돌아와 하나님 앞에 통곡의 눈물을 그 때야 흘렸던 것입니다. 이 눈물은 진정한 회개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내용은 사사기 2장에도 잘 나타나지요..
그들이 보김에서 울었다.
자기 인생을 생각하니 처절하고 안타까워서 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상적인 회개에 농락당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호세아서 6장에 피상적인 회개를 무엇에 비유하였는가 하면,
아침 안개와 이슬에 비유하였습니다.
진정한 뉘우침도 없고 하나님과의 불화의 원인을 제거하지도 않은채
자기 문제의 해결로 하나님을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계속해서 막혀갈 때... 그 실패의 원인을 금식기도와 작정기도와 같은 그런 어떤 특단의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할 때가 없습니까? 잠시 움츠려 들었다가.. 또다시 자기 해볼도리를 다시 해버리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그냥 물러갔다가 다시 나온 것입니다..
그런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펴져 있는 인생이라 할 수 없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징계의 채찍을 내리실 때,
우선은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묵묵히 그 징계의 채찍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빨리 돌아갈 생각말고 바벨론에서 집짓고 포도원 일구며 살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기간 동안은 그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아십니까?
죄로 인한 결과가 얼마나 처절한지 우리로 체득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성화적 차원에서의 징계를 우리에게 행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이런 하나님의 징계를 아는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의 징계에 대해 절대로 과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정말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나를 지옥으로 보내셔도 할 말이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역설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천국을 확신하는 사람이 구원받는자가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징계를 맞아도 나는 싸다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오히려 가난한 심령의 마음의 상태를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을 달게 받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왜 성령에 민감해야한다고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보여줘도 못보고 지나가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누그러 뜨리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의 징계를 아프고 힘들어도 겸손하게 잠잠히 받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무겁습니다.
무엇을 쏟으면 주워담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삶이라는게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이러한 죄를 감당하기 위해서 40일동안 금식하며 광야로 들어가셨습니다. 마태는 이 사실을 '그 때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이어'라고 기록합니다. 왜 광야로 내몰리셨어야 했습니까?
불순종한 우리를 대신하여, 철저하게 순종하는 방식으로 우리 주님은 광야를 유리하는 백성들인 우리를 천국으로 입성시기키 위함이었습니다.

아담의 범죄와 이스라엘의 실수를 만회하시기 위해서 40일동안 금식하고 주리신 이후에, 가장 시험을 당해서 유혹받을 수 있는 가장 어려운시기인 그 때, 시험에서 이기심으로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는 그 일에 우리 인생 전체를 다 드리고, 그것도 모자라 영원한 인생을 지옥에서 보내야 할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시고 시험을 다 이기시고 그 분이 이루신 의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원칙으로 따지자면, 저나 우리나 하나님을 거역한 죄에 대한 댓가로 우리는 평생 아니라 영원토록 지옥에서 치뤄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죄짐을 다 가져가신 것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
지고 간다는 의미는 제거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경고와 위로의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소망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댓글목록

최덕수목사님의 댓글

동주 형제님....
동주 형제님이 타이프한 설교문을 읽어보니 이 설교를 한 저에게도 정말 은혜가 되네요.... 이 설교문을 읽으면서 '설교를 준비하고 전한 설교자보다 설교를 되새김질 하는 분이 훨씬 더 많은 은혜를 누릴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새삼하게 되었습니다.....

구동주님의 댓글

목사님~ 설교를 듣고 받아쓰는 것의 유익에 대해, 마음껏 누리고 깨어져볼 수 있는 것이 정말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전에 종교개혁주일에 말씀 전해주신, 김병훈 목사님과 이곳 현산교회에서 사역하셨던 이수환목사님 설교를 받아쓰던 것을 시작으로 설교 받아쓰기의 유익을 어렴풋이 누렸었습니다. 현산교회에 정착한 뒤로 어느정도 지속적으로 쓰면서 유익을 누릴 수 있었고,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는 확신이 이제는 생겼습니다. 더불어, 지인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말씀을 나눌 때 참 좋았습니다. 제 나름대로 헤매인 시간이 길고 간절했어서 그런지, 이렇게 안정감을 가지고 모조리 받아 적을 수 있는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희귀한지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감사 드립니다. 목사님.
예전에, 설교받아쓰기에 대해 유익한 점을 유치하게 정리한 적있는데, 그것도 남겨봅니다. ^^

- 주일 말씀 받아쓰기의 유익
일단, 개인적으로 큐티하는 방식에 단점이 큰 것 같아서 좀.. 안하게 되었습니다. 큐티는 뭔가 하루 묵상거리를 반드시 만들려는 은근한 의무감이 생기는 것 같고, 했나 안했나에 따라 뭔가 느끼는 감정이 달라져서 형식화되는 느낌도 들고.. 무엇보다, 질문 내용에 국한되어 스스로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유아기 상태에 두게하는데 뭔가 일조하고 있는 느낌도 받기 때문입니다.
여튼, 그래서 주일 말씀 받아쓰기를 해보니.
1. 교훈 뽑아내기, 부자연스럽게 억지로 묵상 결과 도출하지 않아도 됨.
2. 들었던 말씀을 정말 곱씹고 묵상하게 됨.
3. 정말 묵상하게 되었다는 뜻은, 설교자가 정말 심혈을 기울인 설교 하나하나를 받아 쓸때, 근거가 되는 말씀도 찾아보게 되고, 정작 현장에서 크게 감동했던 내용 외에 다른 부분의 강조점을 찾을 수 있게 된다는 것.
4. 그러니 찔려서 진짜 기도하게 됨.(이게 최고임)
5. 찔린게 감사해서 또 기도하게 됨.
6. 또 기도했더니 신나서 성경보게 됨.
좌우간 유익 진짜 많음.
꼭 해보세요. ㅎㅎㅎㅎ 아, 이미 하시고 계실텐데. 뒷북이겠지만 ㅡ,.ㅡ;
근데 좀 꾸준히 하고 싶고 함께도 하고 싶은데 잘 안되네요..
10분단위로 끊어 받아쓰기가 그나마 그동안 해본 결과 좋은 방법이었고, 함께하는 동료들이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 같아요^^

이연경님의 댓글

아~~ 댓글을 안남길 수가 없네요..
저 이설교 들은것 맞나요?? 너무 새로워서 제 설교노트를 찾아보았습니다. 필기가 안되어 있더군요.. 아마도 졸거나.. 정신을 차리지 않았던것 같아요 ㅠㅠ 
이렇게 귀한 말씀을 그냥 스쳐~~ 지나갔다는 것에 놀라고 안타깝고, 또 성도님의 수고를 통해 이렇게 모르고 지나가버릴뻔 했던 보물을 거저 얻으니 너무 감사할 뿐이네요..
아 그리고 밑에 받아쓰기의 유익에대해 쓰신점 저도 동감입니다.
말씀을 깨닫는것이 기도하게 되는 큰 동기가 되는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