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강해(37) <제14장> 구원에 이르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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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강해(37) <제14장> 구원에 이르는 신앙

2006.12.10(주일)


우리가 교회를 다니며 많이 듣는 단어 중 하나가, '믿음'입니다.
'아 그 사람은 믿음이 좋다.' '아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 같다.' 라고 하며, '믿음'이란 단어로 각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는 것을 많이 보곤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중요한 부분을 다루려고 합니다.

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구원의 과정을 '중생 > 믿음 > 칭의 > 성화'의 일반적인 순서로 다루지 않고,
'칭의 > 양자됨 > 성화 > 믿음 > ..' 같은 순서로 다루었는가 하면, 그것은 이 신앙고백서를 기록한 신앙선배들이

1. 하나님 편에서 이루시는 구원
2.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이뤄가는


믿음이라 하는 것은, 죄인인 우리가 의롭다하는 선언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는 수단으로 '믿음'을 택하셨습니다.

칼빈은 '칭의의 은혜가 담겨져 있는 그릇'에 비유하여 '믿음'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믿음이라는 그릇을 구원의 도구로 삼으셨는가?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을 의뢰하는 것과 정반대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의뢰하는 영적인 교만과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가 개척하면서 많이 강조했던 것은, 믿음은 우선 무엇을 믿는 것이라기보다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라는 것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자기를 포기하게 될 때에만 주님을 참으로 믿고 그 분만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믿음은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은 이 믿음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확률과 가능성은 믿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가능성을 보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평가할 때,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다'고 해요. 도무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랬던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라도 자신의 태가 끊어진 것을 알고도 믿었지요. 따라서 확률과 가능성을 보고 믿는 것을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 믿음처럼 보이나 믿음이 아닌 것은 '적극적 사고방식'(옮긴이: 예전 복음주의권 셀교회에서 즐겨보는 책으로 '노먼 빈센트 필'이라는 저자의 책)입니다. 여러분들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믿는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들의 표어를 보면, 아주 용감합니다. '믿는대로 되는 교회'.. 얼마나 용감한지요. 이런 교회는 대게 어떤 구절을 강조하는지요? '믿는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내게 능력주시는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어도 이산이 옮겨질 것이다.' 이러한 것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낙관주의에 불과 합니다. 이런 것을 믿음이 아닌 신념이라 부릅니다.

그러면 믿음은 무엇인가.
첫번째로 믿음의 근거를 살펴봐야 하는데요.

1. 믿음에는 내용이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이 있습니다. 무엇을 믿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근거는 '지식'이지 '경건한 무지'가 아닙니다. 경건한 무지라는 말 아시지요? '주여 믿습니다.'하는데, 그 지식 자체가 성경하고 다른 것. 그것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이성이 필요없는 맹목적인 자기확신이 아닙니다. 내가 이번에 기도하면 주께서 고쳐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그렇게 꼭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항상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로마서 10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이유를 무엇이라 합니까. 열심이 없어서 입니까? 지식이 없어서 망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그 진정한 지식이 없어서 망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저희 교회에서 '서리집사'를 뽑을 때 고민을 많이 하는데요, 일이라고 하는 것이 참 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직분 자체가, 다시말해서 봉사 자체가 믿음생활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치 봉사 열심히 하는 것을 믿음생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 일을 좀 빼앗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맡김으로 신앙의 상승작용을 가져오리라 판단이 되는 사람들에겐 약간의 직분을 맡겨주는 것이 좋겠지요. 어쨌든, 잘못되면 봉사와 헌신 자체를 곧 믿음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믿음의 열매지 믿음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직분을 받고, 교회에 얼마나 더 자주 나오느냐가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어떤 분으로 알고 믿느냐" 가 제일 중요한 것이지요.

2. 믿음에는 동의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실을 인정하고 마음으로 동의하는 것입니다. '맞다!'고 하며 맞장구를 치는 것입니다. 착각하면 안될 것이, 어떤 사람들은 믿어지지 않는 것을 자꾸 믿게 해달라고 하는데.. 그 때는 오히려 '주여 제가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지, 자꾸 믿음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것 자체가 믿음입니다. 없는 믿음을 불어넣으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래서 이해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우리 믿음의 내용 중에 이성을 초월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이해되지 않지만 믿습니다. 그렇다고 신자가 자기가 모르는 일에 대해서, 교회가 무조건 믿으라 한다고 해서 무조건 찬동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 아멘이라고 해야하는가 하면, 성경의 바른 지식에 대하여 아멘이라 해야합니다. 교회는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고, 목회자도 얼마든지 잘못된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아무리 동의하셔도 그건 참으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3. 믿음의 세번째 요소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라 합니다. 의지적으로 인격적으로 주님을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23,24 을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심으로 사람들이 그 이름을 믿었다 하지요.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았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과 기적과 같은 사역을 보고 믿은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 사역에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신뢰하는) 요소는 빠져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몸을 의탁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뢰의 요소가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3가지 요소.
지식이 있고, 그 지식에 대하여 우리가 이성을 가지고 동의하고 이성을 초월하는 내용에 대해서도 동의하고, 그 다음에 신뢰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믿음을 무엇이라 설명하는가.
웨민신앙고백서 14장 1절에 '믿음의 은사로 말미암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믿음이 선물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방편이요, 수단이라는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선물은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질 때 선물이지요. 모두가 다 받는 것을 선물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니고 나눠주시는 분의 마음에 따라 어떤 사람은 갖고 어떤 사람은 갖지 못하지요. 문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자세에 문제가 있지요.

그럼 이 선물은 누가 받는가?
웨민신앙고백서 14장 1절에 '선택자들은 믿어 그들의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는데(히10:39)'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나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믿음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13:48 은 이렇게 말하지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은 다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믿음의 내용은 무엇이라야 하는가?
믿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삼위 하나님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 중에 더 중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삼위 하나님도 말씀을 통해서 아는 것이지, 말씀 없이 하나님을 알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알고 믿는 믿음의 내용은 궁극적으로 진리의 말씀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명령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믿겠다가 믿음있는 자세가 아니고, 교회가 선포하는 말씀이 진리의 말씀일 때, 그 말씀을 받아 들이겠다 라고 하는 것이 믿음을 가진 자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는 없이, 그저 뭐라든지 저에게 말씀하십시오 제가 믿습니다 하는 것은 참으로 믿는 자세라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까 말씀드린대로 경건한 무지입니다. 광신과 맹신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좀 멍하게 있다가, 뭐라 그러면 '아멘', '아멘' 그러시는 것은 믿음이라 할 수 없지요. 그래서 무엇을 믿습니까 라고 물으면 도무지 믿음의 내용을 말하지 못하는 그런 것을 믿음이라 볼 수 없지요. 이런 상태는 매우 심각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늘 문제지요.

(20분25초)
그래서 항상 확인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믿는 지를 확인해보십시오. 무얼 믿는가 어떻게 믿는가. 이것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지요. 진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말씀을 받아들일 때 어떤 자세로 받아야 하는가?
웨민신앙고백서 14장 2절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말씀 안에서 친히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하여(요4:42; 살전2:13; 요일5:10; 행24:14)'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이지요. '말씀 안에 계시되어 있는 것을 기독교인은 참된 것으로 믿으며' 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각 구절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에 따라 행동하되'

두가지죠.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참된 것으로 믿고, 각 구절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에 따라 행동하는 것.
명령의 말씀에는 순종하되, 경고의 말씀에는 떨고, 금새와 내새의 약속의 말씀에 대해서는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심령의 상태로 만들어 놓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는가 를 판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말씀을 어떤 자세로 읽고, 듣고, 받아들이고, 순종하는가' 이것보다 더 중요한 믿음의 판별기준은 없습니다.

다른 것으로 각 사람의 믿음을 판별하기 보다, 저러한 자세가 있는가의 여부로 그 믿음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오순절날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우리가 어찌할꼬' 마음이 찔려서 그렇게 말씀에 반응했습니다. 이러한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 하면,
이 믿음이 주어질 때, 어디서 툭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결국 우리에게 믿음이 들어오게 하는 통로"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의 증거에 의하여 역사한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들을 때 우리 안에 믿음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말씀은 항상 짝을 이룹니다. 로마서 10장 8절과 딤전4장6절에 보면, 그냥 말씀이라고 하지 않고, '믿음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말씀과 믿음이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말씀 없이 믿음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말씀을 모르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믿어와도 말씀이 믿음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대부분 보시면,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십년 지나도 한번도 성경을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사역 내내 믿음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성경을 한번이라도 읽어 보았는지'에 대해 물을 때 단한번도 읽은 사람을 본 경우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 예배시간에 말씀에 집중하지 않고, 설교의 내용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믿음이 생깁니까. 믿음이 생길리 만무하지요.

그럼, 믿음이 말씀을 통해 생기니, 말씀만 들으면 믿음이 꼭 생기느냐고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는 자리에 나와 있다고 다 믿음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 그 믿음의 은사는 그들의 심령 안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이며(고후4:13; 엡1:17-19; 2:8), 통상적으로 말씀의 증거에 의하여 역사한다(롬10:14,17).' 성령께서 택한 자의 마음을 밝혀주셔서 복음을 깨닫게 하셔야 믿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갖고 싶다고 해서, 알고 싶다고 해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주어지는 은혜의 수단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른 수단은 '성례와 기도'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말씀과 성례집행과 기도에 의하여(은혜의 수단) 믿음의 은혜는 증가되고 강화된다(벧전2:2; 행20:32; 롬4:11; 눅17:5; 롬1:16,17).' 어쨌든지 그래서 여러분은 어떻게든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는 자리에 나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지요. 과거에는 현재처럼 성경을 각 개인이 하나씩 보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한 사람이 들고 읽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에는 성경을 들었지요.

그리고 기도 입니다.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숨을 계속 들이키기만하고 내쉬지 않으시면 어떻게 될까요.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여러분은 기도해야 합니다. 또 하나가 오늘 우리가 오전에 거행했던, 성례(성찬과 세례)입니다. 개혁교회는 다른 것으로 시청각교재를 사용하지 않고, '성찬'을 시청각교재로 사용했습니다. 그 떡을 보고 이 떡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증거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할 때, 우리는 믿음이 자라나고 건강해지고, 성령의 검인 말씀으로 죄와 마귀를 대적하게 되고, 믿음의 방패로 삼아서 사단의 유혹, 죄의 유혹을 능히 물리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르켜서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부터 중요합니다. 졸리시는 분들은 이 말씀을 꼭 들으세요.

여기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라는 말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도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믿었다 하면 다짜고짜 구원얻었다와 연결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아까 우리가 살펴 본 요한복음 2장 20절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그 말씀을 믿었지만,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에게 몸을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린 그 광경을 많은 유대인들이 보았다고 합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이것을 보고 믿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바리새인에게 가서, 예수께서 나사로 살린 일을 고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빌미로 예수님을 고발한 것이지요.

그리고 사도행전에 빌립이 사마리아성에 복음을 전파할 때에, 시몬도 어떻게 했지요?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 돈으로 그 능력을 사려고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했지요.

행8:20~22
20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빌립이 전하는,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었으나,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상속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반드시 구원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매우 명백한 증거입니다.

이처럼, 믿음이라할지라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이 있는데 통상적으로 3가지로 나눕니다.


첫번째로, 역사적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번에 말씀을 들으시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 점검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역사적 믿음이라는 것은 영적인 반응 없이, 그저 도덕적인 반응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진리로 받아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옳다고 동의합니다. 특별히 이 믿음을 가르켜 역사적이라 부르는 것은 그 믿음이 하나님께서 행하셨다거나 또 하나님께서 장차 행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마치 역사의 사실을 받아 들이듯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역사적 믿음'이라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있었던 것을 여러분들은 믿으시지요? 그처럼 예수님의 생존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기적을 행하셨음을 믿는 것이지요. 대표적인 예가, 거라사 지방에 귀신들린 사람이지요. 그래서 복음서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을 때, 거라사 광인은 예수님을 보고 어떻게 반응했지요?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라고 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그 다음에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하지요. 얼마나 훌륭한 신앙고백입니까.ㅎ 그래서 야고보사도가 뭐라고 하지요? '네가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떤다' 그런 믿음이야 귀신들도 가지고 있는 믿음인 것이지요. 그런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르켜 역사적 믿음이라 합니다.

두번째는, 일시적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일시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동의하고, 또 신앙도 고백하고, 양심에 자극을 받기도 하고, 감동도 받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경고에 대해 충격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공격하지도 않고, 경멸하지도 않고, 복종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도 가지고 있습니다. 죄를 토해냄으로 마음이 시원해지는 일시적 기쁨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중생한 심령에 뿌리박지 못한 믿음입니다. 해서, 마치 돌 밭에 씨가 떨어지면 뿌리가 제대로 내려지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처음 받을 때에는 기쁨으로 받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 견디다가 이런저런 환란이 닥치면 다시 돌아가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일시적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지요. 구약에는 사울같은 사람, 신약에는 데마 같은 사람.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버리고 떠났지요. 이 일시적 믿음이 매우 위험한데요. 왜 위험한가 하면, 일시적 믿음을 가진 자들 중에는 믿음생활 자체를 포기하는 자들이 있는데, 어떤 일시적 믿음은 믿음생활 자체를 포기해버리지 않고 지속합니다.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고 불같은 열심도 냅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종교적 유익이 얼마나 좋은지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고등한 욕구 중에 종교성이 있는데, 이것을 위해 신앙인의 형태는 끝까지 유지합니다. 일시적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매우 흡사해서 이것을 구별해내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런 분들은 실제로는 종교적 유익만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할 뿐입니다. 마치 연극공연을 볼 때, 감동도하고 줄거리도 다 알지만 관람자 입장에만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 신앙의 주체자가 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그냥 교회 안에 속해 있으나, 참된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하고 수십년 동안 교회 안에서 지내는 것이지요.

세번째는, 이적적 믿음이라고 합니다.
나에 의해서, 나를 통해서 이적이 일어날 것을 믿고 실제로 이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즘 저희 교단에도 아말강이 금이빨로 바뀌는 이적이 일어나고, 그래서 거기에 미혹을 당하고 있지요. 가룟유다도 예수님께서 내보내신 제자들과 함께 많은 이적을 행했지요. 귀신도 좇고 병도 고쳤다고 전도 보고를 하지요. 거기에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런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 거짓 선지자들도 있지요.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내좇고 병도 고쳤는데, 아니 주님께서 저를 모른다고 하실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안 적이 없다고 하시지요. 이것은 너란 존재를 모른다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너와 나는 단 한번도 연결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적적 믿음이 위험한 것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연결이 되기도 하고, 연결이 되지 않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관계없이 발휘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것들이 너희를 미혹케 할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표적이라는 것은 말씀을 증거하기 위한 수단이지, 표적 자체가 진리는 아닌 것입니다. 가룟유다 같은 사람은, 역사적 믿음도 가지고 있고, 일시적 믿음도, 이적적 믿음도 가지고 있었던 대표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무엇이냐
지식과 동의(확신)와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믿을 수 없기에, 믿어야 하는 대상에 대한 지식을 습득해야 하는 것이고, 성경의 내용에 동의하고 확신해야하고, 그다음에 실제적으로 내 삶의 중심을 완전히 의탁하는 신뢰의 요소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님들 중에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나 다소 약한 분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다 똑같은 수준의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보면 '믿음이 적은 자여' 라는 말이 나타나기도 하죠. '네 믿음이 크도다' 라고 하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믿음의 강약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여부가 달라지는가?
그렇지 않다고 웨민신앙고백서 14장 3절에 나와있습니다. 믿음의 강도가 아니라 질이 중요합니다. 강도의 문제는 두번째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특징은 끝까지 인내하게 되고 참고 견뎌서 분명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왜그런가. '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한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히12: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부분에 대해서는 17장에 가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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