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을 주제로 한 아홉 가지 설교' 중에서 /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 눅 13:2…

9,714 2015.07.14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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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받는 자가 적다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 눅 13:23 / 헨리 스쿠걸 '경건을 주제로 한 아홉 가지 설교' 중에서.


인류의 행복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못지않게 인류에 대한 사랑과 선함을 가진 사람들은 인간의 영원한 상태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이 세상의 막이 내리고 무대에서 사라질 때, 그리고 이 세상에서 행한 일을 심판받으라고 부름 받았을 때, 죽을 수 밖에 없는 가련한 인생들에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알고 싶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은 영혼들 간에 서로 다른 상반된 상태 - 어떤 이들은 행복에 초대되고, 다른 이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불행에 처하는 상태 - 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확신하는 이상, 인류가 어떻게 갈라지는지, 천국이나 지옥 중 어느 곳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릴지, 이에 대해 우리는 한층 심도 있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호기심은 칭찬할 만한 것으로서 우리의 복되신 주님의 제자 하나가 이 호기심 때문에 본문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이 질문을 하였을 즈음에, 우리 구세주께서는 장차 복음이 크게 전파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즉, 마치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속히 부풀리듯이, 장차 기독교가 온 누리에 전파될 것이며, 많은 나라들이 신앙을 고백하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예언하셨습니다. 이 질문을 한 제자는 복음이 지면에 널리 전파된 이후에, 이 복음의 효력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미칠지, 그리고 과연 신앙을 가진 자들의 심령 속에 복음의 깊은 뿌리가 내릴지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의 전파로서 구원을 받게 될는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를 칭찬받을 만한 호기심이라고 칭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근거로서 복음의 때와 그 중요성을 가장 잘 아시는 우리 주님께서 친히 이 질문을 제지하지 않고 이에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쓸데없거나 책망받을 만한 질문은 거절하시곤 하셨습니다. 최후 심판의 때에 대하여 질문하였던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그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하고, 다만 그런 비밀한 일들은 아버지께 속한 것이라는 말씀만 들었을 뿐입니다. 또한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나라가 회복될 시간에 대해 질문하였을 때, 그때는 너희의 알 바가 아니라고 주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은밀한 일들은 제자들이 신경 쓸 일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제자가 드린 이 질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열심과 인류의 행복에 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에 대한 답변은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이 질문을 받고 즉시 그의 의심을 풀어 주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무게 있게 권하셨습니다. 지금은 이 후자의 말씀의 온전한 뜻을 밝히지 않겠습니다. 다만 앞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의 의미 즉, 구원을 받는 자가 적다는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시간에는 바로 이 점에 대하여 우리의 묵상을 집중시키겠습니다. 인류의 큰 대적이 그 모든 모략으로 인류의 파멸을 꾸미고 있는 가운데, 우리가 무엇보다 되풀이해서 가르쳐야 할 교리는 다름 아니라 주님께서 베푸신 이 다정한 설득입니다. 천국과 영원한 행복에는 누구든 쉽게 이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 지혜에 대하여 말한 바를 약간만 바꾸어서 우리가 이러한 목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천국을 확신하지 않았을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이를 수 있다." 교회의 문은 지금 활짝 열려 있으며, 사람들은 간단하게 교회의 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니, 이러한 특권은 사람들이 날 때부터 주어지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알기도 전에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됩니다.

지독한 무지나 악명 높은 범죄로 인해 추방당한 자들만 제외하고는 우리 신앙의 의식들과 신비가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화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이마에 표가 있어서 그걸 가지고 우리가 그들의 미래의 상태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죽어 무덤에 눕게 되면, 아무도 다시 돌아와서 자기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말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잘 지내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생각할지라도, 이웃들이 자기들과 같이 행복하게 살다가 행복하게 죽는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의 추정에는 신빙성이 없습니다.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들 모두가 천국에서 제외된다면 천국은 텅 빈 곳이 될 것에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이런 상황을 보았을 것입니다. 끊어진 다리 위에 양 떼가 있는데 제일 첫 번째 양이 맞은편으로 뛰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양들이 앞서 간 양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그 위험천만한 곳으로 함께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욕과 이기주의에 마음이 어두워져서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을 진리라고 믿을 정도로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 반대인데도 불구하고 사정은 이렇습니다. 천국에 가는 길은 매우 넓고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쉽다는 그런 견해가 지금도 여전히 크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견해야말로 가장 위험한 이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공동체가 이런 이단의 교리를 고백할 정도로 매우 무지합니다. 또한 이단의 교리를 큰 소리로 선포하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그러한 유쾌하고 낙관적인 오류를 빼앗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그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들이 영원한 불구덩이에 떨어져 비로소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될 때까지 지금처럼 계속해서 안심하고 지내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그들에게 위험을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들의 피를 우리 머리에다 돌려야 하며, 그들의 파멸에 우리가 연루되어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나의 친구들이여, 성경이 우리에게 확증하고 있는 대로, 우리는 책임감을 가지고, 구원을 받는 자가 적다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확실히 알려야 합니다. 또한 온 세상이 죄악 가운데 있으며, 아버지께서 오직 적은 무리들에게만 그 나라를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려야 합니다.

유감스럽지만 확실한 이 진리를 마음속에 더 깊은 인상으로 남기기 위해서 첫째, 우리는 영원한 행복을 바라는 자들에게 정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사항을 제안할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참된 소망과 비교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고 있는 소망이 얼마나 근거가 없는 것인지 알 수 있도록 그들의 행위와 습관을 숙고할 것입니다.

첫째, 진정 천국을 소망한다면, 존귀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기쁨의 본질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더럽고 완고한 죄인들이 존귀하신 영광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거룩과 얼마나 모순된 일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분명히 하나님은 너무나 순결하시기에 악을 보고 그냥 지나치실 수 없고, 부정을 방관하실 수 없습니다. 그는 악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며, 악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할 것입니다. 죄악 속에서 뒹굴었던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에 초청받는다고 상상할 때, 그들이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 기쁘게 해드릴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것이고, 열기와 냉기가 연합할 것이며, 상대적인 모든 성질들이 조화를 이룰 것입니다.

두 사람이 화합하지 않는데 함께 갈 수 있겠습니까? 서로의 성격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어떤 교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쉽게 행복의 자리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들과 완전히 똑같은 존재라고 상상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선택하여 그 앞에 초청할 것이라고 조금도 기대할 수 없을 테니까요. 오,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시고 그들의 죄를 그들 앞에 열거하실 때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 생각하였는지 그들은 뒤늦게 후회할 것입니다! 그제야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소멸하시는 불이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공허한 이름에 불과한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추측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추측에 은신하여 그들은 설득력 있는 꾸지람을 거절해 버립니다. 하지만 이런 무모함 자체로 말미암아 그 자신이 논박당하는 것이 마땅하며, 또한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의가 실제한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들 간에는 다툼이 없습니다. 곧 하나의 속성이 다른 속성을 말소하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죄를 회개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는 열려 있지만, 계속해서 죄를 범하는 자들은 공의를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비하시므로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그의 존귀하신 아들을 보내셨지만, 회개하지 않는 죄인에게는 결코 용서와 구원이 적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완고한 인생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모욕하면 분명히 진노가 임할 것입니다. 무한하신 자비를 경멸한다면, 전능자의 무서운 보복이 죄인들에게 쏟아질 것입니다.

둘째,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낙관하고 있는 그 행복이 어떤 상태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정말로 쉽게 그 행복에 이르게 될지 알아보십시오.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영광스러운 곳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존귀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그곳의 영광을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성경에서는 면류관, 왕국들, 보화, 기쁨의 강물, 생명의 샘물,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영원하고도 엄청난 영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상징적인 용어들을 가지고 우리가 바라보는 저 행복은 우리의 마음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말로도 저 행복의 실제 상황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비유들과 풍유들은 오직 우리의 이해를 조금 도와주는 것에 불과하며,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고전2:9), 오직 혼란스러운 약간의 이해만을 줄 뿐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나라, 그리고 우리 구주의 품에 누웠던 사랑하는 제자에게 주께서 예언하신 그 실체를 사람들의 마음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영광스러운 상급이 아무런 노력 없이 얻어질 수 있다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위해 아무런 고통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러한 상급이 베풀어질까요? 돈이 될 수 있는 은광석, 금광석을 모으기 위해 광부는 얼마만한 수고와 진통이 있을까요? 사람들은 승진하기 위해서 얼마만한 노력과 고통이 있어야 할까요?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지식을 얻고 식자들 가운데서 인정받으려고 얼마만한 노력과 연구를 하나요? 그리고 우리가 잠자고 있을 때 천국과 영원한 행복이 우리의 품 안으로 저절로 굴러 들어올까요? 분명히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곳의 영광을 과소평가하지 않으시므로 진지한 노력의 가치를 모르는 자들에게 그 땅을 베풀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곳의 행복이 너무나 엄청난 것이기에 이에 대해 게으른 모든 자들이 거절당하는 것은 마땅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원한 행복의 성격상, 소망의 작은 근거가 많은 부분 세상에서의 삶에 달려 있습니다.

천국에 갈 것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과연 천국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하던 대로, 저곳에서도 축연, 술잔치, 호사스런 생활을 즐기고, 또한 어리석인 쾌락과 허탄한 이야기를 하면서 영원을 허비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혹, 재미나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행복을 깔보는 그런 이슬람교식의 모든 생각들을 떨쳐 버리십시오. 그곳의 기쁨은 순수하고 영적이며, 더럽지 않은 것만이 그리고 들어갈 것입니다. 복된 영혼들만이 거룩한 완전을 바라보며 경탄할 만한 복을 누리며, 또한 하나님의 뜻과 성품과 온전히 일치하는 가운데, 그리고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기쁜 교제 가운데서 자신들의 빛나는 모습을 발견하는 복을 누립니다. 하나님을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고, 또한 하나님과 교제하느니 차라리 다른 어떤 것을 따라간 그런 영혼들이 천국에서 거룩한 모습을 보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복되다 하겠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의 일반적인 기질을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그들이 사도 바울이 말한 바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골1:12)한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복의 개념과 성격이 분명하게 달라져야 하거나 혹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심령의 기질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 심령들이 새로운 마음이나 새로운 천국을 소유해야만 비로소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쓰디쓴 쓸개즙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영혼은 잘 되리라고 생각하고, 또한 거룩한 기쁨을 누리기에 자신이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공상한다는 것은 이기주의의 이상한 망령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천국에 들어간 분들의 믿음과 노력을 묵상해 봅시다. 그들이 저 영광의 상을 얻으려고 얼마나 싸우고 애썼으며, 씨름하고 달려갔는지 알아봅시다. 그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런 수고도 없이 그 상을 거져 손에 넣을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노아, 아브라함, 야곱, 다윗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고대의 신앙의 위인들은 큰 고난을 이겨냄으로써 그들이 바라던 저 나라를 얻을 근거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자처하며 저 천국을 소망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의 믿음의 행싱를 길게 나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며, 더 나은 부활을 얻기 위해 억압에서 풀려나지 못한 또 다른사람들의 믿음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초대 신앙의 황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거룩한 고난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천국 문이 열렸고, 또한 그 천국을 소유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복된 심령들에게 자신들의 조물주와 구세주를 향해 불타 올랐던 그 뜨거운 열정이 있었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독교 신앙의 전파를 위하여 자신들의 몸을 기꺼이 불 속에 내던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고난 속에서 절개를 지킴으로 피 묻힌 박해자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잔인한 고문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수치를 당할 만큼 자신들이 합당하게 여겨졌다는 사실을 가장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원수들에게 보여 준 그들의 위대한 긍휼과 사랑에 대해 우리가 뭐라 말해야 할까요? 많은 이교도들까지도 주목하고 감탄한 그들의 겸손과 온유, 공의와 절제, 그 밖에 모든 덕들에 대해 우리가 뭐라 말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은 "보라.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고"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보라, 이들은 자기들이 생각한 대로 말하고, 자기들이 말한 대로 행동하노라"고 했습니다. 플리니우스는 엄밀한 조사를 마친 후, 트라야 누스 황제에게 보고하기를, "자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조그만 잘못되 찾을 수 없었으며, 다만 날이 새기 전에 함께 모여 그리스도가 마치 하나님양 그를 찬양하였으며, 그 후에는 예식에 참여하거나 혹은 조금도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는 맹세, 곧 강탈하지 않겠으며, 훔치지 않겠으며, 간음하지 않겠으며, 거짓말하지 않겠으며, 그들의 믿음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조금도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죄라면 죄였습니다. 만약에 그들 중에 어느 누구라도 술취함이나 부정을 범하는 죄에 빠졌다면, 또는 지금 우리 시대에 가볍게 생각하는 그런 조그만 죄라도 저질렀다면, 그들은 당신에 사람들에게 혹독하게 처형되었을 것입니다. 아니, 스스로도 그 죄 때문에 철저하게 슬퍼하며 애통하였을 것입니다! 당시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지겨운 신앙생활에 끌려 다닐 필요가 없었고, 또는 자신의 의지와 상반되게 억지로 회개를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눈물로써 죄를 고백하였고, 교회 문 앞에서 여러 해 동안 서서 제발 자기들을 받아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때에는 교회의 책망이 매우 엄격하고 무서운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이 죽으면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혹시나 교회에서 출교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바라건데, 이런 사람들을 어려분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게 말해주십시오. 그들이 과분하게 행동하고 그들의 사명 감당이 지나친 것이었을까요? 그러히 않다면 그들이 어리석었기 때문에 수고한 보람도 없이 그렇게 하였을까요? 천국과 영원한 행복을 위한 그들의 수고가 지나쳤을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곳에 힘을 쏟으면 속히 죽어서 그곳으로 옮겨질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여러분이 여태까지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또는 신앙의 황금기에 모든 성도들이 행복하고 훌륭하였다는 이런 이야기들이 오직 허구일 뿐이며, 지어낸 이야기라고 상상할지라도, 저는 여러분이 적은 수의 사람들을 주목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 적은 수의 사람들은 세상을 뒤덮고 있는 죄악의 대홍수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조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아마도 보통의 인구 비율보다 훨씬 높은 도시나 지방에서 두세 사람 정도 있을 것이며, 일반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세상에 있는 천사들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금껏 세상에 있는 더러움을 멀리하였고, 세상의 모든 허영을 경멸하는 훈련을 받아왔습니다. 그들의 열망은 저 하늘에 있고, 그들의 가장 중요한 일은 조물주를 기쁘게 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과 열망은 상당히 거룩하고 순수하며, 그들의 교제는 흠이 없고 유익하며, 다른 사람들이 쓸데없거나 미신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엄격한 거룩과 덕의 규칙을 온전한 품행으로 준수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사람들은 자신의 불완전을 깊이 느끼고, 천국에 이르지 못할까봐 심히 두려워합니다.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우울함이 지나쳐서 끊임없는, 그리고 까닭 모를 두려움에 시달리는 그런 소심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더구나 불평을 일삼고, 자신더라 악하다고 말하며 오히려 좋아하고, 또한 여러분이 그들을 믿는다면 기분 나빠할 그런 사람들은 더더욱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건전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경외심은 바른 사고와 판단에서 비롯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복음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바른 이해로부터 비롯됩니다. 분명히 자신에 다한 거룩한 경계심은 쓸데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셋째 하늘에까지 올라가 보았던 바울 사도 자신도 다른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파한 후 버림이 되지 않을까 주의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기보다 진지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을 조롱하고, 그들이 목표하는 바를 의심하며, 또한 그들만큼이나 자기들에게도 천국이 보장되기를 희망한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들은 자신들의 오해를 깨닫고, 그 지혜의 책에 언급된 사람들과 같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우리가 때때로 비웃고 망신을 주었던 그였습니다. 우리 어리석은 자들이 그의 삶을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목적은 형편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그러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며, 성도들 중에는 몇이나 될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의로운 빛이 우리에게 비치지 못하였고, 의의 태양이 우리 위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의 목적에 더욱 가까이 가기 위해서 복음의 말씀과 교훈을 진지하게 고찰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영생에 이르는 그 문의 좁음과 그 길의 협소함을 온전히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전부 열거할 수 없으며, 또 어느 하나를 장황하게 강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저 훌륭한 '산상수훈'을 훑어봅시다. 그러면 우리 구주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주님은 심오한 겸손을 명령하십니다. 그 겸손은 우리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생각하며, 또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도 만족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한 온유를 명령하십니다. 그 온유는 아무리 해를 받아도 참아내는 것이며, 어떠한 모욕이나 경멸을 당해도 화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순결을 명령하십니다. 그 순결은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을 금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보편적인 사랑을 명령하십니다. 이 보편적인 사랑은 우리 자신의 행복만큼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빌고, 또한 아무리 악한 원수들이라도 결코 복수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며,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최선을 다해 그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한 쪽 뺨을 친 사람에게 다른 쪽 뺨도 대 주며, 우리의 속옷을 가져간 사람에게 우리의 겉옷도 내주라는 우리 구주의 말씀을 사람들이 아무리 더럽게 물들일지라도, 우리는 마땅히 그 말씀을 따라 손해를 당해야 합니다. 우리의 오른 눈이 죄를 범하거든 그것을 뽑고, 우리의 오른 손이 죄를 범하거든 그것을 잘라내라는 말씀은 아무리 수지 맞는 일이나 재미있는 향락이라도 그것들이 우리의 신앙에 올무가 되거든 과감히 버리라는 의미이며, 또한 우리의 정욕과 타락한 감정을 제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육제의 금욕을 활용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부모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가장 절친한 관계보다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아울러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거나 혹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들과 기꺼이 헤어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명령들을 단순히 완전하라는 조언이며 그 자체로서 훌륭한 말씀이지만 별탈 없이 무시해도 좋은 그런 것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안됩니다. 이 말씀들은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이 모든 말씀을 성심성의껏 실행하지 않고 행복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5:19). 즉, 천국에서 작다 일컬음을 받는다는 말씀은, 모든 주석가들에 따르면, 그가 천국에서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확실하게 소망하기 위해서는 매우 정밀한 자(척도)로써 자신의 행위를 주의 말씀에 맞추어야만 합니다.

제가 여기서 덧붙여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확실하게 소망하는 사람은 단지 율법의 강요나 상벌 때문에 자신의 의무를 이행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내적이고 자유로우며 자원하는 원리입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들은 단순히 외부적인 동기에 의해 행동하지 않고, 단순히 두려움에 이끌리지 않으며, 단순히 언약에 매수되지 않고, 단순히 율법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동시에 선한 것에 강하게 이끌립니다.

거룩하고 신앙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많이 주목하지만, 그들을 사로잡는 것은 율법의 권위와 상벌이라기보다는 율법의 합리성, 청결, 그리고 선함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존귀하고 매력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율법을 지키는 데는 큰 상급이 따른다고 믿습니다. 또한 이끌리는 거룩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삶에 율법을 적용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복되신 구세주께서 자신에 대해 하신 말씀이 어느 정도 제자들에게 적용되며, 따라서 예수님의 경우처럼, 제자들의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육체의 식욕이 양식을 향해 끌리게 되어 있는 것처럼, 비록 우리의 생명을 위한 양식의 필요성을 여기서 고찰하지는 않겠지만, 이와 같이 본질적이며 자연스러운 성향이 선하고 칭찬할 만한 것을 향해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자질들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이제 사람들의 기질과 행동이 얼마나 그 자질들과 일치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세상을 살펴볼 시간입니다. 우리가 옛 세상을 회상해본다면, 얼마나 빨리 죄악이 온 땅에 관영하였는지, 또한 얼마나 빨리 모든 육체가 타락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 오직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이 대홍수에서 구원받을 가치가 있었습니다. 아, 그것도 아니군요. 그 중에서도 함은 저주를 받아 악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 저주 사건 이후 하나님의 교회는 아주 좁은 한구석에 한정되고 말았습니다. 어두움이 온 땅을 덮었을 때, 오직 팔레스타인 지역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깨우쳤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의 말씀을 보이셨고, 이스라엘에게 그의 율례와 공의를 보여 주셨지만, 그 밖에 모든 나라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자기 마음의 욕심대로 버려졌고, 자신의 손으로 만든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들은 마귀들을 숭배하였으며, 그들의 종교적 신비는 더러운 것들로 가득하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혹시 어떤 이교도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나 하는 토론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교도들에 대하여 논쟁하는 것보다 우리 자신의 구원을 확증하는데 우리는 더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말해야 하겠습니다. 곧, 모든 유명한 이교도들의 삶 가운데서 저는 진실로 선한 사람의 성품을 한 번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도덕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싶지는 않지만, 그들의 매우 훌륭한 행위들 속에 섞여 있는 그들의 교만과 자부심 때문에 저는 그들의 행위를 겉만 그럴듯한 일종의 죄로 간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 밖에 두세 사람 정도는 무언가 다르지 않겠느냐고 가정해봅니다. 그렇더라도 아무런 의문도 없이 영원한 파멸로 곤두박질치는 저 거대한 무리들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그 당시는 놔두고 현 세상의 상황을 바라봅시다. 브리어우드(Breerwood)가 그의 연구에서 밝힌 슬픈 통계가 있습니다. 그는 온 세상을 서른 가지의 부류로 나누었는데, 그 중에 열아홉은 이교이며, 여섯은 이슬람교, 그리고 오직 다섯만이 모든 교파를 망라한 기독교라고 합니다. 저는 그의 통계를 그대로 믿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나머지 인류에 비하여 적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이들 중에서 정통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또 얼마나 적은가요? 저는 가톨릭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감히 정죄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일반적인 어려움 외에도 오류와 미신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적지 않은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이교도들에게 관심이 적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우리 기독교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생각해보고, 또한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생각되는 바를 알아봅시다. 첫째, 우리가 발견하는 바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너무나 무지하여 영생에 이르는 길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도리가 환히 밝혀지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다만 추측으로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무지가 변명거리일 뿐 아니라 다른 죄악을 덮어 줄 구실을 제공해 줄 것이라고 그들 스스로 상상할지 몰라도, 이사야 선지자의 경고는 무섭기만 합니다. "가지가 마르면 꺾이나니 여인들이 와서 그것을 불사를 것이라 백성이 지각이 없으므로 그들을 지으신 이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조성하신 이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리라"(사27:11)

지식이 없어 망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으며, 더욱이 악하고 수치스러운 사람들의 숫자는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중에서 일 중독에 빠진 사람들과 술주정뱅이들, 도둑질하는 자들과 속이는 자들, 압제하는 자들과 착취하는 자들, 잔소리꾼들과 욕하는 자들, 행음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 그런 가증한 죄를 저지르는 모든 저주받은 자들을 제해 버린다면, 우리 교세가 얼마나 줄어들겠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적은 수로 급속도로 전락하겠습니까? 다 합쳐보아도 한 구석에 다 들어갈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이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하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여러분은 너무나 많은 우리의 이웃들을 무분별하게 정죄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일 먼저 정죄한 사람은 바울 사도 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6:9-10) 여러분, 보십시오. 얼마나 무거운 선고가 내려졌는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아래에 속해 있는지요!

저는 또하나의 다른 죄악을 지목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이 죄악에 빠질까 우려하는 죄악입니다. 그것은 소름끼치고 까닭을 알 수 없는 맹세의 죄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무런 유혹이나 즐거움이나 혹은 유익이 없는데도 이 맹세의 죄를 범함으로 자신들의 영혼을 망치고 있습니다. 혹은 죽음으로 맹세하고 혹은 착실한 사람 앞에서 증명하기에 부끄러운 그런 사소한 일들을 입증하려고 하나님을 부름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얼마나 자주 모욕하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그들은 연설을 화려하게 하는 하나의 장식 정도 맹세를 생각합니다. 또한 맹세하지 않고는 그들의 말이 결코 힘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심각한 모든 죄의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성격과 분명히 불일치합니다. 이 죄 하나만으로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을 지옥에 떨어뜨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서 자주 행해지고 옹호되는 그런 모든 악에 대하여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를 정도입니다. 아아, 우리는 덕과 악덕의 자리를 바꾸며, 선을 악으로 대신하는 불경건에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에 관한 율법을 경시하는 것을 당당하다고 생각하며, 또한 우리의 육욕을 참는 것을 유치하고 소심하다고 생각합니다. 강한 믿음은 판단력 부족의 증거라고 생각됩니다. 섭리에 대한 의존은 앞을 내다보는 예견의 부족이라고 생각되며, 오직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데만 똑똑합니다. 야망을 크게 품지 않으면 누구든 큰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못합니다. 손해를 눈감아 주는 것은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오, 세상은 신앙을 피해 달아났도다! 세상 어느 구석에서 우리가 신앙을 발견할까요? 위대한 사람들의 궁정에서 신앙을 발견할까요? 교만과 사치가 신앙을 그곳에서 쫓아버렸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 세상의 일과 쾌락에만 관심이 있고 다른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가난한 자의 오두막집에서 신앙을 발견할까요? 시기와 불만이 그곳에 기숙합니다. 그들은 외면적인 부족함에 온 마음을 빼앗겨 버려서 자신들의 영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도시로 들어가 보면 신앙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속임, 강탈, 그리고 무절제가 거기서 만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입니다. 시골로 들어가 본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순결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공의로운 재판을 찾아보지만 오로지 억압을 발견할 뿐이며, 의를 찾아보지만 울부짖음을 발견할 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모든 것을 말하였는데도,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자신들은 충분히 안전하며, 우리가 지적한 그런 죄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아, 그렇다고 안전할까요? 그럴지라도 그들은 천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은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으며, 추잡하고 수치스러운 악이 없다는 것은 천국을 얻기에는 부족한 명분입니다. 영혼이 거룩한 은혜를 갖추었는지 살펴보십시오. 그 거룩한 은혜들만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여러분에게 줍니다. 저는 여기서 단 한 가지만을 지적하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흉내냅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어찌나 적은지요! 그 심령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얻는 능력과 효능을 느끼는 사람은 어찌나 적은지요!

이 사랑은 중력과 같아서, 이로 말미암아 영혼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게로 쏠리며, 그 본래의 중심으로서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이 고상한 열정을 체험한 사람들 - 심지어 그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방황하고 헤매고 있을 때, 곧 우리 자신과 같은 어리석은 피조물에게 완전히 빠져 있을 때에도 - 은 하나님에 대한 이 사랑이 넘치는 영혼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효험을 주는지 압니다. 즉,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기 유익을 잊어버리게 되며, 오직 하나님의 유익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을 기쁘게 하거나 유익하게 하려고 힘쓰며, 혹시라도 이러한 목적을 해칠까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체험을 한 사람들은 그 사랑의 교제 속에서 큰 기쁨을 누리며, 그 교제가 없다는 것을 거의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감히 사랑한다 말할 수 있다면, 과연 이 사랑의 효과들에 해당하는 것들이 여러분에게 있는지 다음과 같이 한 번 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모독을 당하느니 차라리 여러분과 여러분의 모든 친구들이 욕을 먹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여러분의 최대의 관심과 임무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모든 죄를 경계합니까? 여러분에게 아주 소중한 것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위해서 세상의 소중한 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언제나 사모하십니까?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일인가요? 오랫동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모든 환경이 여러분에게 힘들게 느껴집니까? 우리가 이러한 기준으로 자신을 점검해 본다면, 우리 대부분의 믿음이 모래 위에 세운 것이 아닐지 두렵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지금은 사정이 좋지 않지만 - 여러분은 천국 가는데 필요한 은혜를 아직 얻지 못했거니와 그 은혜를 얻으려고 노력도 한번 해보지 않았습니다 - 어느 땐가는 모두 잘 될 것을 희망한다고 제게 말할 것입니다. 즉, 죽기 전에 회개하고 돌이킬 것이라고 여러분은 말하겠지요. 하지만 바라건대 나의 형제들이여,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여러분이 약속한 이 회개를 언제 시작하리라고 생각합니까? 지금으로부터 2,3년 후, 곧 여러분이 조금 더 즐기고 욕심에 탐닉한 후라고요? 여러분이 그때까지 살 수 있을지 무엇으로 보장합니까? 여러분처럼 죽음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여러분의 이웃들이 매일 쓰러져가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그때까지 산다고 합시다. 지금보다 그떄에 여러분이 회개할 가능성이 더 많을까요? 몇 년 전에도 여러분이 똑같은 생각과 결심을 했지만 효과는 전혀 없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때와 동일한 시험과 올무에 걸리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습관이 그만큼 더 굳어질 텐데 그때에 여러분이 욕심을 쉽게 극복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잘못된 길로 더욱 멀리 간 다음에 돌이키는 것이 더 쉬울까요?

아마도 여러분은 임종할 때의 회개에 희망을 걸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희망이 없을 때에 여러분의 욕심을 버리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다 쓰고 남은 찌꺼기 같은 시간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한 회개의 효력과 타당성에 대하여 예리하게 반론을 제기한 어떤 훌륭하고 박식한 사람들의 견해를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어 참을 수 가 없습니다. 그들은 매우 단호하고 엄하게 이런 회개를 비난했습니다. 참되고 거짓 없는 회개, 곧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사랑과 복종이 따르는 회개는 결코 지체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의 기초는 이러한 회개가 있는 영혼들 속에 세워집니다. 하지만 참된 회개를 하는데는 여러가지 큰 어려움이 따릅니다. 회개할 시간이 부족하며, 때로는 몸의 질병이 회개를 방해하며, 그리고 죽을병에 걸렸다가 병에서 회복되면 그때에 약속한 것을 저버리고 도로 옛날로 돌아가는 인간의 타락성 또한 회개를 방해합니다. 이런 것을 감안하면, 임종할 때의 회개는 거의 진실성이 없으며, 우리가 임종 시, 곧 스스로 돌이킬 힘이 없을 때 주권과 능력을 가지고 죄와 싸우기란 적절하지 못하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와 같이 회개를 미루는 사람들 중에 구원받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다 했지만, 우리가 지금껏 증거한 진리를 절대로 인정하지 아니할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인류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생각할 것입니다. 천국이 이처럼 텅 비어있고 황폐한 곳이 되며,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으리라고 그들은 상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 죄인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근거해 규칙을 정하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신 말씀과 정반대되는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그 얼마나 어리석고 정신 나간 짓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복한 길을 가르쳐 주시고, 그 길로 갈 수 있도록 그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우리를 진심으로 초대하셨으며, 또한 우리의 위험을 자주 말씀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으로도 우리가 그의 선하심을 멸시하고 또한 그의 모든 은혜를 저버린다면, 그의 견책을 하찮게 여기며 그의 책망을 하나도 받지 않는다면, 저주를 초래하고 스스로 지옥을 향해 곤두박질친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지옥에서 우리를 끌어내시고, 우리의 의지와 반대로 우리를 천국에 있게 해주시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저 복된 천국은 황폐화되지 않도록 하려고 아주 악한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새로운 식민지 같은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보좌를 모시는 허다한 천군과 천사들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우주의 크기를 알 수 없고, 이성을 가진 존재들 중에 행복하고 선한 사람들과 악하고 파렴치한 존재들이 어떠한 비율을 차지하는지 알 수 없습니ㅏㄷ.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창조하기 전에 무한히 행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거룩한 천사들의 무리조차도 필요하지 않으시며, 더구나 악하고 불신앙적인 무리들은 결단코 인정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제 저는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주장한 교리는 슬프고 애석한 내용이지만, 이 교리를 묵상하면 매우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어느 진지한 사람이 죽기 3,40년 전, 아니 그보다 조금 많거나 혹 적거나 한 때에, 함께 모인 허다한 무리가 모두 어둡고 침침한 무덤에 내려가며, 그 영혼들 중 대부분이 저주를 받고 끝이 없는,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을 바라보고 그런 사실을 생각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그에게 큰 슬픔과 고통을 줄 것입니다. 하지만 이로 말미암아 그는 자극을 받고 최대한 근면하고 근신할 수 있으며, 이로써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대한 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심령들 속에 근면과 근신의 정신이 깊이 새겨진다면, 사역자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영혼들 중 얼마라도 구원하려고 얼마나 충성을 내며 열심을 내겠습니까?

부모들, 그리고 남편들과 아내들모두 그들의 가까운 친척들을 돌이키기 위해, 그리고 지옥의 가장자리에서 그들을 끌어내기 위해 얼마나 열심을 내며, 필요한 방법을 동원하겠습니까? 끝으로, 우리 각자가 이 얼마나 뜨거운 거룩한 열정으로 이 공통의 파멸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원해내겠으며, 우리의 부르심과 선택을 확실하게 해두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지금까지 제가 전한 설교의 목적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저의 설교에 복과 능력을 베풀어주셔서 바로 이러한 귀중한 목적을 이루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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