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1.10. 주일 오전 설교

9,739 2015.07.23 00:37

짧은주소

본문

교회를 다니기 시작 했을 때 14년도 초반 즈음에 처음 들은 말씀이 신명기 중간 부분이었는데요. 그래서 신명기의 첫 부분 강해부터 듣고 싶은 마음에 들었는데, 너무 좋아서 올려봅니다. 항상 수고해주시는 사역자 분들과 성도님들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이 율법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더라-
*****신1:1-5*****
1.이는 모세가 요단 저쪽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
2.호렙 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까지 열 하룻길이었더라
3.마흔째 해 열한째 달 그 달 첫째 날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명령을 다 알렸으나
4.그 때는 모세가 헤스본에 거주하는 아모리 왕 시혼을 쳐죽이고 에드레이에서 아스다롯에 거주하는 바산 왕 옥을 쳐죽인 후라
5.모세가 요단 저쪽 모압 땅에서 이 율법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더라 일렀으되

신명기는 구약의 전체적인 내용들을 포괄하고, 구약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책이다. 이사야 서나 시편과 같은 구약의 성경들도 신약 저자들이 많이 인용을 하지만, 그 이상으로 50회 이상 신명기를 인용할 정도로 신약 저자들이 신명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신명기는 그런데 무슨 신학 사상이 아니라, 모세가 설교한 설교의 내용이다. 모세가 했던 설교는 오늘날 지역 교회처럼 정규적인 예배 안에서 행해지는 예배 순서 중에 행해지는 설교가 아닌, 그와는 성격이 많이 다른 설교였다. 오늘날 설교는 어떻게 진행이 되는가? 서적을 보고, 주석을 보고, 말씀을 충분히 묵상하고 난 다음에 말씀을 전하게 된다. 그런데 모세가 지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는 설교는 신학 연구 후에 전해지는 설교가 아니었다. 이런 좋은 교회당에서 행해지는 설교가 아니었다. 즉, 모압 평지라는 야전에서 온 백성이 함께 모여서 들은 설교였다. 그리고 지금 이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40년의 광야 생활을 통과한 사람, 수많은 사람들이 엎드러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땅이 입을 벌려서 삼켜지고, 불뱀에 물려서 죽임을 당하고 엎드러진 가운데에서 살아남아서 지금 모압평지에 이른 사람들이 바로 출애굽 제 2세대들이다.

본문 3절을 보게 되면 이 설교가 언제 행해졌는지 볼 수 있다. 40년 11월 1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출애굽 해서 나오게 된 때를 원년으로 삼아서 그때를 첫달 첫날로 정했던 것을 기억할것이다. 그래서 유월절이 1월 14일날 행해지게 되어지고, 그 다음에 출발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그러니깐 출애굽 시작 이후로 약 40년이 흘렀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면 그 거리가 40년이나 지나야 할 정도로 긴 거리였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본문에 나와있는대로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이후로 열 하루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고 본문 2절에 나타나고 있다. 아주 짧은 거리였다. 그러면, 무엇한다고 대체 40년이나 흘러갔는가? 대체 40년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신명기 기자는 본문 2절과 3절에 우리에게 40년이나 걸린 이 길이 11일 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기록을 했다. 도대체 40년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3개월만에 시내산에 도착하게 되고, 빽빽한 구름으로, 번갯불로, 천둥소리로, 나팔소리로 임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나시려고 했을때 이스라엘은 범죄한 백성들이라 하나님의 임재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세를 중보자로 내세워서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달라고 말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려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호렙산으로 끌어 올리시고 40주야를 밤낮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게 하시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받았으나 그 말씀대로 지켜 행하지 못하는 죄인들의 형편을 헤아려서 죄를 속할 수 있는 제도 성막 제도를 계시해 주시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성막을 다 만들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고, 급기야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의 구름이 움직이자 민수기 10장 11절을 보면, 비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향해가는 그런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열하루면 갈 수 있는 그 길을 40년이 걸려서야 이제 겨우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갈 수 있는 가나안 땅 남쪽 경계지역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지금 이 본문이 이런 상황 가운데에서 주어졌다. 지금 이 당시에 출애굽 1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 다 죽어 엎드러지고, 출애굽 2세대만 남았다. 이들은 온갖 상황과 고초를 다 겼었다. 출애굽 했던 인원들이 200만명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런 이들이 40년동안 다 엎드러졌다고 생각한다면 거의 매일같이 장사지내는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 가운데에서 광야 생활을 통과해서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는 가운데에서 모압 평지에 이르렀다. 모세는 지나간 40년의 광야 생활을 회고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완악했는가를 조목조목 이야기했다. 이 설교를 들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의 자신들의 영적 실상을 살펴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신명기 설교를 보면 알겠지만, 모세는 죄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런 완악한 백성들에게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설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이 민수기에서 전반부에는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진노, 후반부에서는 그런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으로 이방 세력들을 이기게하시는 일이 일어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요단을 건너가야 하는데 요단 동편 지역에서 이미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절판 지파, 즉, 두지파 절반이 동쪽에서 이미 기업을 차지했다. 그래서 이제 요단 강을 건너서 서쪽으로 향해야 하는 상황 가운데에서 모압 평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하시고 오래 참으셨는지를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들의 불순종과 불신앙은 끝없이 계속 되었지만, 그것들을 능히 덮고도 남을만한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의 은혜를 그들에게 끝없이 주셔서, 그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이제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 때문에 소망을 갖는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항상 다짐을 한다. 회심할 때마다, '이제는 회심할 때이다', '이제는 새로운 은혜를 경험할 때이다', '이제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 라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런데 실제로 삶의 현장에 가서 살아갈 때에 여전한 삶의 모습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눌리고, 우리 스스로 지치는 어려움을 겪게 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이럴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어떤 소망도 가질수가 없다.. 절대!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크신 긍휼과 자비를 베푸셔서 400년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의 보증의 사건들을 이루신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얼마나 컸는지 이런 노래를 불렀다.
"주께서 내 심령이 평강에서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내어버렸음이여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3:17-23)
예레미야애가는 이제는 바벨론에 의해서 완전히 다 나라가 무너지고, 어린 아이들이 반석에 내팽겨 쳐지고, 임산부들이 배가 갈리는 상황을 바라보면서 불렀던 애통의 노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가운데에서도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우리들을 절대로 물리치지 않으신다. 어떻게든 끌어당겨서 자신에게 붙어있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40년동안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붙어있게 하시는 훈련을 감행하셨다. 그것에 대한 방식은 두가지 방법이 있엇는데,
1.죄에 대한 매서운 심판이다.
>>자녀를 순복시키는 방법 중에 하나가 자녀가 잘못했을때 징계하는 방식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과정을 겪었다. 하나님께서는 40년의 세월을 겪으면서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불신앙에 대한 책임을 물어서, 특별히,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정탐꾼들이 불신앙의 보고를 하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원망했을 때에, 정탐의 40일을 1일당 1년으로 쳐서 40년이란 기간을 채우셨다. 불신앙의 죄가 얼마나 크면 이러한 징계를 취하셨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미 이스라엘은 죽어 엎드러져야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시내산에서 그들은 이미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올라갔을 때에 밑에서 이들은 금송아지 우상숭배를 벌였다! 그러니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으로 본다면 이미 죽어 엎드러져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징계 수위를 아주 크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징계는 항상 우리의 형편을 헤아리신다. 어느 부모치고 자녀를 때릴 때 죽으라고 때리는 부모가 있겠는가?! 아무리 매섭게 징계해도 자녀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끔 징계를 한다. 이스라엘을 장자로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런 방식으로 징계하셨다.
2.그리고 크나큰 사랑을 베푸셨다.
>>매섭게만 자녀에게 대한다면 자녀에게 기꺼운 순종을 불러일으킬 수가 없다. 때로는 그 징계를 내리지 않고 전폭적으로 그를 받아주는 방식을 통해서 부모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인식시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런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다루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멸하시지 않으시고, 가나안 땅 앞에 오게끔 하셔서 하나님의 군사로 양육시킨 것이다.

혹 누가 '40년의 시간이 왜 필요했는가?'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겠는데, 부정적으로 보자면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한 심판이겠고, 긍정적으로 보자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전쟁할 수 있는 군사로 훈련받는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훈련기간을 겪지 않고, 곧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면 거기에 발도 붙이지도 못하고 광야로 내 쫓겼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볼 때 40년의 기간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셨는데, 이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었다. 그것은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의 군대를 진멸하는 사건이었다. 본문 4절을 보게 되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교를 할 때가 아모리 왕 시혼의 군대와 바산 왕 옥의 군대를 쳐 부순 후라고 나타나 있다. 이 아모리 왕 시혼을 쳐부순 사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 창세기 15장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동물을 쪼개고 불을 지나가게 하시면서 언약을 맺으셨다. 이 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4대 후에 즉, 400년 후에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가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도착하기 직전에 이 아모리 족속을 물리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셔서 마침내 자신의 뜻을 이루실 것을 보증하는 사건이 바로 이 군대들을 멸한 사건이었다. 여호수아서를 읽어보게 되면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 도하 작전을 통해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의 첫 성 여리고 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정탐꾼 둘을 보내서 그 안에서 라합을 만나게 됏는데, 라합이 무엇이라고 고백했는고 하니,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시고,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의 군대를 멸하신 이 여호와 때문에 우리 민족의 간담이 다 녹았다'라고 고백했다. 이미 이 사건의 소문이 다 퍼져서 그들이 이미 심리적으로 패배 상태에 있엇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 군대들을 쳐부순 사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건인 것이다. 특별히 모세가 고별 설교를 쭉 해나가다가 마지막 신명기 31:4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이미 멸하신 아모리 왕 시혼과 옥과 및 그 땅에 행하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실 것이라". 그들은 여기서 가나안 족속이다. 즉, 이 군대들을 쳐부순 사건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승리의 보증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죄가 만연했지만,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그분이 얼마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인지를 나타내셨다. 구원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다. 구원받은 신자의 마땅한 반응, 감사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우리의 보증으로 삼아, 때로는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처럼 살지 못하지만, 주께서 선한일을 시작하셨으니 반드시 이룰 것이라는 그 믿음 외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확보하거나 확신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참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우리가 연약하기에 '봐주면 기어탄다. 그러니 그러면 안된다'라고 한다. 물론 인간이기에 이런 연약한 부분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참 사랑으로 받아주고 참아 보아라. 사람이 안 변하겠는가? 우리들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40년의 세월을 보내고 난 다음에 모세의 설교를 통해서 40년의 세월을 회고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들의 그 인생을 회고해 보라. 두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1.별로 내 삶의 진보와 성숙이 드러나지 않았다.
>>특별히 외적으로 믿지 않아도 잘 살아가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때로는 부러움을 갖지 않는가? '남들은 저렇게 승승장구하는데 난 왜이런가?' 좌절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그런데 이런 가운데에서 어떤 복을 베푸셨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를 가까이 하는 것을 복이라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들을 하나님에게로 끌어 당기신다. 그런 고통과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참 복에 참여케끔 하신다. 만약에 우리들이 그런 고통과 연단의 과정이 없었다면 우리들의 고집과 아집은 절대 꺾이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왠만한 일로 자기의 사고와 패턴을 잘 고치지 않는다. 모두가 다 고집스러움을 가진다! 그런데 그런 고집스러움을 가지면 가질수록 하나님의 다루심의 기간은 그만큼 길어지고 그만큼 우리들의 삶이 어려워짐을 알아야한다! 만약에 우리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불신앙 가운데 사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고통과 어려움이 없다면 기억하라. 당신은 사생자요 유기자다! 정말 언약의 백성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반드시 쳐 순복시키는 것이다. 야곱의 인생이 이를 보여주지 않는가? 어릴 때부터 속이고, 외삼촌네 집에서 20년동안 고통을 겪었고, 에서를 만나기 전에 또 꾀를 부리고, 그러다가 천사에 의해서 환도뼈가 부러진 것이다. 그래서 울면서 하나님께 회개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백성으로 우리를 부르시기를 바라신다.
2.또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셨는가를 깨닫게 된다.
>>이사야 선지자의 표현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데 하나없는 우리들을 아픈 상처를 싸메는 방식을 통해서 우리를 지키시는 것이다.

그런데 모세의 설교는 과거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왜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인간이 중심이 되는 바벨탑과 같은 그런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고 통치하는 참된 하나님의 나라를 팔레스테인 땅에 이루기를 원하신 것이다. 따라서, 모세의 설교는 이 일에 초점을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민수기와 신명기를 읽어보게 되면 상황이 다르다. 상황이 다르다는 말은 시간적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안에서 다르다는 것이다. 지리적으로는 민수기는 모압 평지에서 끝나고, 신명기도 모압 평지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같다. 그러나 지리적인 면으로는 같았으나 민수기와 신명기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이제는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뤄야 하는 가운데에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구원받고 난 다음에는 어떠한가? 처음에는 음식물을 토해내고 난 것만 같은 시원함을 경험한다. 회심을 한 신자는 이런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지나고 난 다음에 얼마나 삶이 어려운가..? 이전에는 개의치도 않았던 일들이 나에게 양심을 찌르는 일로 다가오고,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나에게 너무나도 크게 다가오고, 너무나도 커보이는 죄 때문에 압도되기도 하며, '과연 내가 신자 맞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한다. 이것들이 뭐 이상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구원받고 난 다음에 신자의 삶은 '평안'이 아니다.

신자가 구원을 받고 난 다음의 삶이 이와 같다. 무조건적 은혜로 구원받고 난 다음에 깨어나고 나면 얼마나 할일이 많은지 놀라게 된다. 기회만 타면 미혹하려는 사단과 싸워야하며, 이 시대를 거스려서 싸우는 것 등등 너무나도 많은 싸움이 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신자는 힘들어 해서는 안된다. 싸움이 남아있다는 것 자체로 힘들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 이미 따놓은 싸움이고, 그 싸움의 승패의 좌우는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있고, 우리가 얼마나 전폭적인 신뢰로 하나님께 나아가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가나안 땅에서 훈련 받아야 하는 상황 가운데에 있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믿음으로만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봐야 절감하게 된다. 오늘 먹을 양식이 없어봐야 안다 그말이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메시지는 무엇이었는가? 3,5절을 보면 그 율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고 되어있다. 신명기는 Deuteronomy로서 Deu는 '두 번', Nomos는 '율법'이라는 뜻이다. 신명기는 반복해서 설교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명기는 모세가 자기 아이디어로 설교한 것이 아니라, 이미 시내산에서 받은 말씀으로 설교했다는 뜻이다. 지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말씀이 필요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시내산에서 설교한 내용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같은 문제에 빠져있는다. 항상 그렇다. 이스라엘 백성 또한도 그랬다. 금송아지 우상숭배 사건을 통해서 죄를 범했는데도, 다시 가데스 바네아에서 불신앙의 보고를 통해서 또 죄를 범하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죄를 범해 심판을 받았다. 그렇게 하면서 40년동안이 지났는데, 그들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가? 그렇지 않다. 그럼 40년의 시간이 부족한 것인가? 우리의 문제는 시간의 부족에 있지 않다. 회심한 사람은 보통 1년 정도 간에 사람이 다 뒤집어진다. 그리고 그 삶의 수준이 근근히 명맥을 이어가는 신자라고 불리는 이들의 수준을 훨씬 초월한다! 오늘날 조국교회 안의 문제가 무엇인가? 명목상의 신자, 거짓 신자들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교회라고 이름으로 커뮤니티를 이루면서 서로 그냥 주고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냥 종교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삶의 변화가 일어날리 만무하다. 아무리 가르쳐도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에 따라서 삶이 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다시 가르치는 것이다. 신앙 생활을 잘하는 방법은 무슨 신비한 이적이나 신비한 묘책에 있지 않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했던 것처럼 인간의 죄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경험들을 통해서 내 아이디어와 내 힘과 내 뜻을 통해서는 절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을 절감하고, 그리하여 주님께서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에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것만이 가장 나를 나답게 만든다는 것을 경험하고 그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신앙 생활'이다.

신앙 생활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다. 내가 앞서가지 않고, 주님을 앞세워서 주님과 함께 가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모세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명령을 그들에게 전한 것이다. 다 알렸다고 되어있다. 빼놓지 않고! 66권 성경 전체의 내용은 폼으로 준 것이 아니다. 다 알고 믿으라고! 그 전체 안에서 한 구절이 뜻하는 것이 무엇이며, 한 구절 안에서 한 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라고! 주신 것이다. 따라서 성경 전체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지 못한채 한 구절이 갖는 의미를 알리 만무하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참 잘안다. 그러나 그 앞 뒤는 잘 모른다. 슈퍼맨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가난에 처하든 부에 처하든 그 상황 가운데에서 주를 의지하여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주의권에 있던 사람들이 몇몇 구절들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가려고 하는데, 이것은 마치 보자기로 지구를 싸려는 것과 같다.

모세는 이 말씀을 다 알릴 뿐만아니라 다 설명했다. 단지 선포만 하지 않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오늘 날로 말하자면 강해 설교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설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설교는 주석 보고, 참고 서적 보고, 그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가능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주지 아니하시면 설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모세가 잘한 것은 자기의 견해와 자기 생각을 보태지 않았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자신의 언변을 자랑하거나 세상 지식을 자랑하거나 나열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록하고 남기신 이 말씀을 묵상하고 정리해서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이다. 청중들도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되고, 6일 동안의 삶 가운데에서 설교자를 위해서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말씀 사역자는 목숨을 걸고 기록된 계시의 말씀을 따라서 전해야 할 것이고, 그리고 듣는 사람들은 다른 어떤 달콤한 것에 귀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적용되는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에 그렇다. 개혁교회에서 은혜의 수단하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제일먼저 말씀이 아닌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어리석은 자를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다" 우리 말로 전도라고 되어있지만 본래는 선포이다. Preaching, 바로 이 '설교'다!

문제는 이제 말씀을 받는 자세이다. 처음에 말씀을 받을 때에는 겸손하고 두려워한다. 이스라엘 백성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다가 점점 늘어가면서 완고해졌다. '그 말씀이 그 말씀이지 뭐..' 이런 자세를 점점 보이게 된다. 처음에 교회 찾아갈 때 말씀 때문에 찾아간다고 한다. 세월이 좀 지나고 나면 말씀이 다 그렇다고 자세를 완고하게 하고 듣게 된다. 그런데 이런 자세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과 불순종의 삶을 살게된 계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의 귀로 말씀을 들을줄 알아야 한다. 마음의 귀를 열어야 한다. 역사가들이 과거를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역사를 보여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과거를 알 수 없다. 우리가 과거에 실수와 좌절을 반복했다고 하면 이제 그러지 않아야 하는데 계속 하지않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 실상을 드러내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변화되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 수 없고, 진보의 삶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모압 평지에 불러 놓고 말씀을 전한 것이다. "너희가 40년의 광야 생활을 했지? 너희가 알아야 될 말씀이 무엇인지 내가 알려주겠다", "이제 너희가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거기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내가 알려주겠다" 이런 의도를 따라서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모압 평지에 두고, 그 흩날리는 머리카락, 바람소리, 황량한 광야에서 목청을 높이면서! 신명기를 설교한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