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7-8. 청년부 수련회 예배

10,347 2015.08.08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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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7. 수련회 개회 예배
*****애3:12-13*****
12.활을 당겨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심이여
13.화살통의 화살들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예레미야애가라는 제목 자체가 보여주듯이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슬픔의 노래이다. 그렇다보니 우리로 하여금 읽는 데에 있어서 부담을 느끼게 해주는 성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통 인생들이 생각하는 화사하고, 웃음이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만을 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런 우리 측면에서 슬픔과 어려움의 과정 속에서 더욱더 큰 기쁨을 주신다.

예레미야가 목도한 것은 이스라엘의 멸망이다. 이것이 예레미야애가 1장 3절에서 잘 보여준다.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은 이러한 비참함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는가? 이것이 예레미야애가 1장 18절, 20절에서 보여준다.
애1:18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애1:20 "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내가 환난을 당하여 나의 애를 다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하오니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가고 집 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나이다"
여기서 보여주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멸망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은 목적성을 가진다. 모든 피조물들이 마땅히 다 하나님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심판의 내용으로 징계하셔서 멸망당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애가가 슬픔의 내용만 전해준다면, 우리로 하여금 소망보다는 좌절만 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성령이 주시는 확신이 바로 이번 본문의 말씀이다. 그것은 곧 "주께서 우리를 과녁 삼아서 집중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신 분이 우리에게 집중하고 계신다. 고통의 상황 가운데에서도 그는 나를 바라보시며 집중하신다. 우리가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곧 그의 미워하심이 아니요, 사랑하심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에 이러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 확신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그가 나를 치시는 것조차도 주의 바라보심의 극심하심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확신이다. 욥 또한도 이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지 않았다. 욥은 정말 모든 것을 빼앗겼다. 자식들도 다 죽고, 돈도 다 사라지고, 아내 또한도 배신하고 등등.. 여러가지 환난에 이리치이고 저리치이고 몸 한군데도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에 욥이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 하나님이 없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의 행사를 알 수 없으나 그가 나를 단련해 가시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기억하라.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집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욥23:8-14
8.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11.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13.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14.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15.8.7. 수련회 주 예배

예레미야애가 3장 1절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 당한 자는 나로다"에서 이스라엘 전체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신이 겪는 것으로 여겼다. 이는 교회가 유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은혜 아래에서 동일하다. 그러므로 현 시대의 교회의 쇠퇴에 대한 무관심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 예로 모세가 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두 돌판에 십계명을 받고 있을 때, 이스라엘은 그 밑에서 금송아지 우상숭배사건을 벌였다. 그러면 이 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범했으니 모세 혼자 살아남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를 보게 되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그러면서 이를 자기의 잘못으로 여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 또한도 교회를 대할 때에 동질의식을 가져야 한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는가? 도저히 설명이 될 수 없는 일이다. 생각해보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죄도 없으신 분이시다. 솔직히 이런 비천한 인간 따위는 버려도 상관 없는 분이신데, 이러한 분이 인성을 취하사 우리로 형제삼으사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애초에 인성 안에 그 분을 가두는 것부터 이미 그 분에게는 형벌의 차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우리는 고작 우리 하나 버리고 다른 사람의 인성 하나를 취해서 생각하는 것조차도 그렇게 괴로워하는데, 예수님은 어떠했겠는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되어 간다는 것은 타인의 연약함에 대한 동감이 더해져간다는 것이다. 책망하고 권징하는 자도 책망 받는 자처럼 행해야 한다. 책망받는 자의 죄가 자신에게도 두려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판이나 해부를 해보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아주 쉽다. 그러나 기도나, 하나님의 두려운 형벌에 대해서 나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이정도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항상 남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오히려, 건조하고, 비판하고, 지적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열매가 아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절 "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빛 안에서 걸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에서 나오는 어둠은 물리적인 어둠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한 약속들이 있다. 외적인 언약 형식에 있어서는 다양성이 있겠으나, 그 근본은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둠은 이것이 안보이는 것이다. 도저히 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 보이질 않는 것이다. 이 확신이 없어지는 근거가 3장 3절부터 쭉 나오는 내용들이다. 이 상황들은 도저히 회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그럼 이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것은 앞의 예배에서 봤듯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거역 때문이다. 즉 죄 때문이다..!

로마서 1장 18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에 의하면 불의와 거짓이라는 뗄래야 뗄수 없는 것 때문에 이러한 고통을 겪은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곧 불의 때문이다. 우리가 항상 주의해야할 것은 우리의 입장에서 무슨 사리판단을 하는 버릇을 없애야 한다. 옳고 그름의 근원자가 하나님이다. 이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경건이다. 구원이 회복의 측면이 있을 때에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이 옳고 그름의 근원지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의 이스라엘이 그러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이 애가가 바로 이런 백성에 대해서 약속이 사라진 건 아닐까 하는 그러한 두려움에 휩싸여서 두려움에 떨며 눈물로서 부른 것이다.

이 애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출애굽기 32장을 조금 살펴보고자 한다.
출애굽기 32장 9-10절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멸하고 약속을 철회하신다고 하신다. 이런 때에 모세가 출애굽기 32장 11-12절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라고 말한다. 언뜻보면 하나님 앞에서 모세가 대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멸하시지 않으신다. 모세 안에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로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가질 수 없다.

그리고 모세가 이후에 돌판을 가지고 내려와서 백성을 보고서 돌판을 깨뜨린다. 이를 하나님이 책망하지 않으신다. 즉, 도를 넘어선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이 상황이 엄중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출애굽기 32장 26-28절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에서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벌하시는 부분이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이다. 즉,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 가운데에 일종의 소원의 방식으로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형벌을 주시는 사건이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3천명이나 죽이시다니 너무하지 않은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리석은 질문이다. 장정만 60만에 이에 곱하기 4에서 가족단위로 따진다고 해서 보게되면 거의 240만명 중에 3천만명 정도로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신 것이기에 그만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크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승리의 내용이 무엇이 되야하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올바른 것, 그 가운데에 죄의 개입이 없는 것이다. 이러지 못한 경우에는 어찌 해야 하는가를 보려면 출애굽기 33장 7-11절을 보면 된다.
7.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8.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10.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11.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즉, 이렇게 죄를 범해서 회막이 진 바깥에 쳐져서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곳에 있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그 장막 문에 서서 예배했듯이 우리는 그 때에도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유기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떠나셨다는 것은 정말로 떠난 것이다. 이 때 유기자는 분노나 포기의 방식으로 반응을 한다. 즉, 하나님의 진노가 진정한 진노가 되게끔 한다.
그러나 택자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떠나셨다는 것은 우리가 회개해야 되겠구나 하는 것을 다시 생각케끔 하는 것이 된다. 출애굽기 33장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러하지 않은가? 회막을 떠나신 여호와를 그들은 바라보고 있다.

예레미야애가 3장 12-13절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아주, 고통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왠만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세상에서 고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있어서 여유로움을 가져야 한다. 진정한 복이 오히려 고통 가운데에서 온다. 이에 반대하고 "나는 고통 받기 싫다!"라고 한다면 회개하라. 더 나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지금 어려움을 주실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인이라면 예레미야애가 3장 17-23절에서 예레미야가 고백하는 것처럼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서, 정말 앞은 칠흙처럼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 내 소망은 끊어져서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신 것인가..?"라는 질문이 생길 때에도 무엇이라고 고백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주께서 내 심령이 평강에서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내어버렸음이여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이처럼 신자는 이렇게 극심하게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서도.. 소망이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말이다. 이러한 극도의 어려움 가운데에서 자기의 순수한 죄악성과 주의 '공의로우심'을 발견한다. 내 죄악성의 끝을 보임으로써 주의 공의와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심(초월하심)을 보게 하신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를 과녁삼아 쏘심으로써 지금 당장 그것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쏘아서 죄의 끝을 보게하시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도 않고, 이러한 고통이 없다고 한다면, 유기자일수도 있음을 기억하라.
히브리서 12장 1-9절
1.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 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4.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5.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예레미야애가 3장 24절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에서 볼 수 있듯이 택자들의 마음 속에는 내가 어떤 지경에서도 하나님의 소유임을 확신한다. 나에게 고통과 어려움이 없다면 사생자요, 유기자다. 우리는 항상 우리 측면에서 사리를 판단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러한 권한이 없다. 항상 주로부터 나온다. 모든것이 말이다.
예레미야애가 3장 37-38절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예레미야애가 3장 32-33절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에서 보면, 참 하나님이 치사스러워 보인다. 본심은 말 안하시고, 일부러 엄하게 다루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측에서의 판단은 다 내어버리라. 아인슈타인이 중력이 지구가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이라고 정의를 내렸던 뉴턴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서 인간의 관점에서 지구를 바라보지 않고, 빛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서 중력장과 그에 대한 이론들을 완전히 뒤바꿔놓아서 일반상대성이론과 특수상대성이론을 내어 놓았던 것처럼, 우리는 인간 측에서의 판단을 다 내어버리고 새롭게 바라보아야 한다. 아인슈타인이 했던 것보다 훨씬더 절대적인 것이 우리에게 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진실하시다. 우리가 연약하기에 동시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 뿐이다. 삼위일체 교리처럼 하나님의 뜻과 존재에 대한 양 국면을 다 버려서는 안된다. 예정도 마찬가지다. 항상 양 국면 다 붙들어야 하는 것이다. 양날에 검 위에 서서 물이 꽉찬 양동이를 양쪽 어깨에 짋어지고 걸어가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생들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된다.

예레미야는 바로 이러한 인식이 있었던 것이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3:25-26)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3)
"주께서 명하신 바를 원하게 하시고, 원하는 바를 행하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구원을 잠잠히 바라며 기다리라. 이 바라봄 또한도 주께서 이루어 가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라. 주께서 이루어가시니 저도 하겠나이다..

예레미야애가 3장 27절 "사람을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에서 멍에는 징계의 짐이다. 젊을 때에 죄로 갈 수 있는 길이 더 열려있다. 그만큼 우리의 자유도 크다.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의 뜻이 더 밝혀지기를... 우리의 죄로 말미암은 형벌이 아닌 의로 말미암아 받는 고난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지경까지..! 우리는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번 수련회에서의 본문은 바로 이것이다. "화 조차도 복이라..!"

내 주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가라. 인생의 길의 고난이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겠는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신다. 두려워말라. 죄를 지어도 주께서 한번 택하신 자는 어떻게든 최적의 구원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

욥42:1-6
1.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15.8.8. 수련회 폐회 예배
*****롬11:29-36*****
29.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로마서 11장 32절은 말만 보면 하나님께서 장난 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로마서 11장 30절에서의 '너희'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전반적인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주가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멸망에 이르게 된다.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하고 그로 인해서 죽으셨다. 그리고 이러한 것으로 인해서 이방 교회에게 구원이 오게 되었다. 즉, 이스라엘의 배도로 말미암아서 이방 교회에 구원이 뻗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여기서 끝이 난 것이 아니었다. 이방 교회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 중에서 일종의 질투심이 유발이 되었다. "이방인인데, 왜 저들이 구원을 받는가? 우린 버려졌는가?"하는 질문을 본인 자신들에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유대인들 가운데에서 택자를 또 부르신 것이다. 이것이 베드로와 고넬료에 대한 예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에서 로마서 11장 32절이 주어진 것이다. 즉, 어떤 이들의 망함으로 말미암아 부르고자 하는 이들을 부르신 것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에 대하여 입을 막게끔 할만한 말씀이 로마서 11장 29절에 나타난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예정의 섭리에 대해서 숫자로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작은 부분도 알기 힘들다.

로마서 11장 33-34절에서 사도바울이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는 이와 같은 겸손을 소유해야 할 것이다. 다 덮어놓고서 겸손한 척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해 할만한 그릇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인식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척도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드려서 갚으심을 받을 수 없다(롬11:35) 왜 그러한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내 미약한 열심으로 나의 연약함을 판단하지 말고, 다 하나님께 내어 버리라. 진리가 우리의 감각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시각과 후각과 미각 등등 이러한 것들 조차도 상대적으로 사실이다. 절대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짓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이 감히 어떻게 이러쿵 저러쿵 사리판단을 하겠는가?! 진리만이 절대적 기준임을 기억하라. 우리는 세상이 소유치 못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다.

로마서 11장 36절에서 보여주듯이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송영을 위해서 쓰신다. 다 그에게서 나오고 다 그에게로 돌아간다. 이 사역에 우리가 일부 참여하게끔 하신다. 이 얼마나 영광인 것인가. 이 미약한 존재로 하여금 미약한 능력으로 세상 나라 전체보다 훨씬 광대한 주의 나라의 일부라도 이루게끔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크고 광대하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육적인 소욕이 커서 쑤시는 곳이 많다. 특히 청년 때에는 더 그렇다. 이곳 저곳에서 죄는 우리를 푹푹 쑤셔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이것이 정당하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고통이든 아니면 무엇으로든 간에 주의 구원으로 이끌어 가실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의지하는 것을 다 제하여 버리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현산교회에 와서 처음으로 청년부끼리 간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그 때의 일을 회상하고, 그리고 지금 현재의 나의 영적 상태를 생각해보아도 참 어리석구나 하는 한숨밖에 나오지 않지만, 점차점차 주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말씀을 들으며 자라가면서, 하나하나씩 전에 당연히 잘못이라고 여겨졌던 죄들을 제거해 가시며, 전에는 죄라고 여겨지지 않았지만 주의 법에 어긋났던 교묘한 죄들까지도 점차 죽여가시는 은혜로 인해서 자라가게 하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물론 아직도 제 죄는 크고, 주께서는 저의 교만을 누르시기 위하여 그 남은 죄를 점차 죽이게끔하시고, 주의 재림때까지 완전한 의인으로 있지는 않겠다만, 그래도 이 기쁨을 글로나마 나누고 싶기에 이렇게 씁니다..^^ 그를 위해서 주께서 쓰시는 말씀 사역자 분들과 다른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이 상황, 가족관계가 어떠한 것, 어떠한 특정 분야에서의 학문을 하고 있는 것, 어떠한 경제 상황 가운데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어떠한 육체적인 질병에 시달리고, 특히 약한 영적 연약함까지도 주께서 제게 주신 구역이라는 사실을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더욱더 감사함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아직 청년이기에 어떻게 보면 육적으로 자유도가 크고, 영적인 질병에 빠질 우려가 더욱 큰 상황이며, 저보다 더욱더 많은 고초와 재난을 겪고, 쑥과 담즙을 겪으신 많은 성도님들 앞에서 이런 말을 쓰기는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머리로 삼는 한 몸인 교회의 한 성도로서 자라기에 감사함으로 느낀 점을 두서 없이 썼습니다..^^ 항상 모든 성도님들과 말씀 사역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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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호님의 댓글

수련회 말씀을 잘 정리해서 올려주셔서 1박 2일의 청년부 수련회에 함께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그날그날의 말씀을 받아적고 다시 정리하는 김원동 청년의 좋은 습관으로 인해 저도 유익을 얻게 되네요.
마치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렇게 집중하는 청년의 열정을 보며 한편 부러운 마음이 듭니다.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 받으며 자라가는 우리 교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