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23. 주일 오전 및 밤 예배

9,918 2015.08.24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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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주일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못 나오시는 분들도 있으시고, 말씀을 듣고 싶은데 중간 중간 짬날때 들을 때 끊기거나 하는 것 때문에 여러가지로 염려가 있으신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부족하지만 정리한 내용을 올려봅니다. 글솜씨가 부족하기도 하고, 언어적인 능력 또한도 부족해서 여러가지 면에서 잘 정리된 것은 아니고, 하나님께서 목회자 분들의 마음과 입술을 통해서 전한 내용을 충분하게 글로 다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보시는 분들에게 작게나마 위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15.8.23. 주일 오전 예배
-네가 성읍으로 나아가 치려할 때에는-
*****신20:10-20*****
10.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11.그 성읍이 만일 화평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모든 주민들에게 네게 조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12.만일 너와 화평하기를 거부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13.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넘기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안의 남자를 다 쳐죽이고
14.너는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가축들과 성읍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너를 위하여 탈취물로 삼을 것이며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적군에게서 빼앗은 것을 먹을지니라
15.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
16.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17.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대로 하라
18.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가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19.너희가 어떤 성읍을 오랫동안 에워싸고 그 성읍을 쳐서 점령하려 할 때에도 도끼를 둘러 그 곳의 나무를 찍어내지 말라 이는 너희가 먹을 것이 될 것임이니 찍지 말라 들의 수목이 사람이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에워싸겠느냐
20.다만 과목이 아닌 수목은 찍어내어 너희와 싸우는 그 성읍을 치는 기구를 만들어 그 성읍을 함락시킬 때까지 쓸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하게 하신 후에 시내산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율법을 주시면서 민수가 10장 12절 이하부터 시내산을 떠나기 이전에 여러가지 일들을 행하셨는데, 그 중 하나가 민족을 계수하는 일이었다. 이 계수는 그냥 일반적인 차원에서 어디 몇명, 저기 몇명 하면서 하는 차원의 계수가 아니라 전쟁에 참전할 수 있는 남자들을 계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쟁을 참여하는 이들에게 믿음이 부족한 자들을 돌려보내셨다. 이는 하나님의 전쟁의 성격이 물리적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께 의지함에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맥락이 아니더라도 주께서 돌려 보내신 이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낙성식을 거행하지 못한 자나, 포도원을 만들어 놓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나, 한 여인과 약혼을 해놓고 결혼을 해보지 못한 자들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무엇을 우리가 볼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 나라의 고상함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이 고상한 나라에 속해있는 우리가 어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해서 보여주신다.

교회의 본질에는 절대 사람의 idea가 개입 되어서는 안된다. 개입이 되어서는 절대 교회가 서 있을 수가 없다.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사는 공동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영적으로 무장한 공동체인데 이 예를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의 예를 통해서 볼 수 있다. 밧세바와 동침한 다윗이 전장에 나가있는 우리아에게 밧세바와 동침하라고 권하면서 자신의 죄를 숨기려 했을 때에 우리아는 자신이 지금 전쟁에 나가있는 자들을 뒤로하고 아내와 히히덕 거리면서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신자의 성격을 잘 드러내 보였다.

앞에와 전쟁이라는 규정에 있어서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전쟁 전에 있었던 일들을 담은 앞의 본문과는 달리 오늘의 본문은 전쟁 수행 방식에 대한 것을 담고 있다. 먼저는 이방인과 싸울 때에는 화평을 먼저 선언하라고 명령하고 있으시다. 그런데 이에 반대하는 경우에는 죽이되, 다 죽이지는 않고 남자만 죽이고, 여자와 유아들과 가축과 성읍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탈취물로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만약에 이러한 화평의 선언의 요구에 회답하고 성문을 연다면 조공을 바치고 섬기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그러면 이방 족속이 아니라 가나안 족속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는가? 이를 살펴보게 되면 하나도 남김없이 몰살시키라고 되어있다. 이를 보는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하나님, 너무 무자비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인데 다 죽이라니요..?" 인간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살펴보게 되면 이 질문은 어느 정도 합당한 질문으로 보이나 우리는 이 질문을 하고 이 질문에 대답하기 이전에 이 명령을 하신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이 질문의 근원지는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시요,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가나안의 심판 권리가 하나님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가나안은 지속적으로 죄를 범해옴으로 이제는 극에 달했다. 그렇기에 이는 공의의 차원에서의 심판의 시행인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기 때문에 결코 불공평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의 죄 또한도 후에 징계하심을 보면서 이것이 꼭 가나안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만 봐서도 안된다. 그리고 가나안 족속 중에서 기브온 족속이라고 있는데, 여호수아서에서 기브온 족속이 가나안 족속이고 예루살렘에서 8km정도 떨어진 거리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지역에서 살았던 족속임에도 불구하고 이방 족속이라고 속여서 마치 먼 곳에서 온 것마냥 위장을 해서 여호수아와 그 백성들 앞에서 화평을 선언했다. 이에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이방 족속이 화평을 선언한 것인줄 알고 받아들여 주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들이 가나안 족속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에 여호수아가 이들을 다 말살시키지 않았고, 이들이 비록 거짓증거를 했다는 점에서 종의 생활을 해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생명을 살려 놓고 이스라엘의 구역 안에서 살게한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특별히 가나안 족속이라는 것 때문에 다 말살시키라고 명하신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왜 가나안 족속은 이렇게 다 멸하라고 하셨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이전에 이스라엘이 어떤 민족으로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잘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이다. 이스라엘의 성격은 '거룩함'이다. 거룩하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이다. 이방 백성들이 이스라엘을 보고 하나님을 사모하게끔 해야 했고, 이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실체화 해야했기 때문에 올무의 소지가 될 가나안을 진멸하라 하신 것이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우리 하나님의 죄에 대한 반응은 똑같다.

우리가 죄의 종이고서는 죄를 죽일 수조차 없다. 우리는 이런 면에서 거룩의 책임을 지닌 자들이다. 그러므로 죄죽임의 역사가 항상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는 고린도전서 5장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있는 음행죄나 각종 우상숭배와 여러가지 죄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약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만 봐도 교회 안에 있는 죄가 더욱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함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반드시 없애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의 흥망성쇠를 다 쥐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성결을 파괴하는 죄는 다 쳐죽여야 한다. 왜 그러한가?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교회 안에 있는 죄가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천사가 아니기에 유기체적 성격을 띤다. 인류는 있으나 천사류는 없다. 그렇기에 한 사람이 죄에 감염 되어지면 그 누룩이 곧바로 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부의 적이 매우 치명적이다. 이런 차원에서 가나안의 죽임을 시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분 1초 매순간마다 죄죽임을 해야한다. 그럼 이를 우리 자신 안에 적용해보자면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보통 남의 죄를 칼같이 판단하고 이런 저런 기준을 들이대면서 기준에 부합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죄를 처리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지극히 크다. 그러나 반면에 내 안에 있는 죄에 대해서는 전혀 무감각하다. 아주 관대하다. 정작 자기의 죄를 처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영적 전쟁의 패배자나 다름없다. 우리가 왜 죄와의 싸움에서 지는가? 죄의 목줄을 완전히 끊어내지 못한 이유 때문이다. 그럼 왜 끊어내지를 못하는가? 다소 기쁨을 줄 거라는 어리석은 확신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오늘의 교훈을 몇가지로 요약 해볼 수 있겠다.
1.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 지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하나 뿐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면서까지 우리에게 사랑을 표현하신 그 분께서 우리를 치신다면 그것이 무슨 이유 때문이겠는가? 죄 때문이다..!
2.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분명 우리에게 승리를 보장하셨는데 패배 했다면 우리의 이유 때문이므로 회개해야 한다.

본문 19절 이하에 특이한 말씀이 나타난다. 이는 전쟁의 장기전을 고려해서 하신 말씀이다. 보게 되면 전쟁이 장기전으로 길어지게 되면 보통 지치기 때문에 물불 안가리고 닥치는대로 다 죽이는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오늘날의 화학전과 비슷하게 보면 되겠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서 하나님께서는 "들의 수목이 사람이냐?"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그런데 이 말씀만 보면 전쟁하면서 자연까지 파괴하지 말라는 정도의 명령으로 보이나 이 명령은 그 명령도 포함 안된다고는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한 차원을 뛰어넘는 명령이다. 전쟁시에 일어날 무자비한 살육을 금하시는 것이다. 신자는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넘지 말아야할 선이 있고 고려해야할 대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 '멸하라 vs 살리라' 이 두가지 명령은 왠지 화합이 안되어 보인다. 그러나 이 두가지 명령이 기가막히게 조화되는 경우를 우리의 믿음의 선진인 아브라함이 행했다. 전쟁을 치루고 돌아 오는 아브라함에게 소돔 왕이 제물을 주면서 "사람은 내게 보내고 제물은 네가 가지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에 아브라함이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오라기나 들매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소돔 왕을 거절한 후에 소돔에 죄악이 심히 커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치려할 때에 아브라함이 의인 10명이 있다면 이들을 치지 말아달라고 간구했던 사람이었다. 이처럼 신자는 죄와의 싸움을 싸우면서도 사랑과 자비가 결함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15.8.23. 주일 밤 예배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엡5:11-14*****
11.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14.그러므로 이르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빛은 하나님에 대한 표상으로 성경에 많이 언급하는 것이다. 이 빛은 물리적으로만 보아도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모든 만물들이 이 빛에서는 명백하게 드러나고 자라난다. 빛은 절대속도는 지닌다. 즉 초당 300,000km를 가는 속도로서 1초에 지구 7바퀴 반을 도는 속도이다. 이 빛의 속도는 측정자의 상태와 상관없이 동일한 속도를 지닌다. 달리면서 빛을 보는 자나 가만히 서서 빛을 보는 자나 빛의 속도는 저 속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빛은 우리 경험을 이미 초월한 존재라는 것이다. 여전히 신비의 대상인데 현대의 과학자 중 아인슈타인이라는 사람이 이 빛을 기준으로 우리의 경험에서 증명되었던 것을 다시 정립하였다. 즉 빛을 기준으로 놓고 특수 상대성 이론이라는 것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를 말하는 이유는 물질 세계에서도 우리 경험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 수준에서 하나님의 광대하심은 더더욱 알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저러한 상대적인 물질 세계보다 절대적 기준인 말씀이 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참 빛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게끔 한다.

그런데 빛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 뿐이신데, 이러한 표현을 우리에게 돌리셔서 우리를 빛이라고 여겨주신다. 이 우주 상에서 어떤 존재도 이 영광된 이름을 받을 수조차 없다. 그런데 우리가 그 이름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셔서 참 빛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사 우리로 하여금 빛이라 여겨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빛이라" 이 말씀을 말로만 듣고 끝내서는 안될 것이다. 빛이신 그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역사 가운데에도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흥분하고 만족해야 함과 동시에 두려움과 긴장도 함께 지녀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무서우니까 벌벌 떠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긴가민가해서 두려워 떠는 것도 아니다. 말씀 안에서 경건의 의무를 가졌기에 두려워 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5장 8절, 11절처럼 빛의 자녀가 됐으면 그 안에서 행해야 할 의무를 지니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분에 의해 새롭게 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변화되어져 가는 측면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이 마음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주안에서 빛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서 여러가지 소원으로 이러한 빛의 열매들을 행하기는 하지만 이것들은 다 주의 인도하심을 항상 잊지말아야 한다. 예전은 나만 자랑하려는 소원으로 가득찼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열매를 내라는 명령은 실제로 우리 측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연속이다. 명령이어서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명령에 기쁘고 즐거워하며 이 명령을 주셨다는 것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동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율법들은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은혜인 것이다. 그렇기에 신자는 '지켜야 함'을 인식하는 순간 동시에 '은혜로구나'도 같이 인식하는 자들이다. "이제는 싫지 않고 원하는 마음이 있구나!"하는 것에 감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유기자들은 이를 심히 부담스러워 한다. 하나님이 주신 세상의 얕은 수준의 법까지도 사람들은 피하려하고 범하려 한다. 이것이 유기자들의 모습이다. 정작 지키려해도 자리를 드러내려고 지키는 것이지 절대 하나님의 영광됨을 드러내는 데에 관심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은 앞에 율법 설명에서 말했다시피 적극적인 명령으로 볼 수 있다. 금하는 것은 곧 금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행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인간은 한계가 있어서 위험적인 요소를 보게 되면 저리로 치우라고 말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여전히 우리를 세상 속에 두시고 죄의 잔해를 우리 속에 남기셨다. 우리 편에서는 이것이 가늠이 안되서 "그냥 속 시원하게 죄 다 처리해주시지 왜 이렇게 남겨 놓으신 것인가? 그리고 우리나 그냥 따로 동 떨어져서 하나님이랑 편하게 살면 되지 않겠는가?"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우리를 어둠 가운데에 두신 것은 어둠이 얼마나 어둠되는지 빛이 얼마나 빛되는지를 보이시기 위해서 두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선명함이 어둠과의 싸움 가운데에서 더욱더 찬란하게 빛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명령들을 사랑의 메시지로 들어서 깊게 상고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실 것임을 믿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금 겪는 고난, 어둠 속에 있는 것 등등 이는 두려워 하며 넘어지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의 그 최종 목적지를 향해서 달려 나가라고, 이끄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어둠을 도리어 책망하라고 하시는데 곧 드러냄이다. 이는 어둠의 어둠됨을 빛의 빛됨을 드러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가는 그런 곳마다 어둠이 책망 받아서 드러나고 우리의 빛됨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세 가지의 일이 일어난다.
1.어둠 가운데에 있는 택자들을 불러내는 수단이 된다. 우리의 선명함이 어둠 가운데에서 드러나기에 주의 택자들이 돌이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차원에서 베드로 사도가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권면한 것이다.
2.유기자들이 우리를 비난할 때에 그들은 도무지 핑계할 수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빛이 드러남을 보고도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찬란하게 빛나는 빛을 보고도 못본척 했기 때문에 이제 도무지 주 앞에서 핑계거리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분봉왕 헤롯이 요한의 책망을 듣고 요한을 죽였는데 이 일도 마찬가지이다. 헤롯이 핑계치 못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어둠 가운데에서 물리적으로 육체의 삶을 오래 살았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것 하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 열매도 결실도 맺지 못한다. 그러나 짧은 생일지라도 빛에 거한다면 이는 찬란하게 빛나는 영광된 삶인 것이다
3.교회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한다. 유형 교회 안에서라도 어둠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빛됨을 더 드러내려 하심이다. 그래서 어둠이 있는 곳에서 빛도 더욱 그 찬란함이 빛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믿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비추이시리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빛으로 있음을 거절치 말라. 이는 물론 주께서 일하시지만 빛의 사람은 의지가 반영되지 않을리가 없다. 무조건 주를 향한 의지가 발동되게 되어있다. 때로는 무너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소원이 계속 남아있고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죄에대한 민감성은 더더욱 커져서 주를 향한 의지적 사랑이 발동이 안될 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빛을 드러내지 못함은 어둠에도 열매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망하지 못하고 빛 되지 못하는 것이다. 전도서 2장 10-11절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에서 말하듯이 이처럼 자신에게 유익한 것 다 해봤자.. 바람을 잡는 것이고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물리적인 빛 가운데에서도 생명이 자라나고 어두움 가운데에서도 죽어난다. 이는 하나님의 진리를 이 속에 숨겨두신 것이다. 그러나 뭐 가끔 예외도 있다.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생명을 붙들고 있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이시지 우리 측에서 핑계거리 만들라고 주신 것은 아니다. 우리가 빛됨을 당연히 여기고 그래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음을 믿으라. 절대 물러서지 말라. 이것이 곧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가시는 방식이다. 우리를 그런 빛 가운데에 들이셨는데 얼마나 황송한가? 하는 것 보라. 이런 명칭이 어울리지 않는 자들이다. 비천한 인생이요, 무지한 인생 길을 걷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런 우리가 무엇이관대 빛이라고 여겨주시는가?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발로 걷어찰 것인가?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잠시 잠깐 울려퍼지다 말 명예의 소리와 잠시 잠깐 존재하다 말 돈과 관계 등등의 유혹 때문에 이것에 미련 가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걷어차지 말라..!

마태복음 5장 14-16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에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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