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2.25 성탄 감사 예배 - 설교 정리

9,879 2015.12.25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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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매우 유익하고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15.12.25. 성탄 감사 예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즘 보편적인 사람들은 대개 성탄 절기가 되면 백화점이나 놀이 시설 등을 이용하면서 보내고, 또 이 때 즈음에 그런 시설에서는 여러 가지 행사들을 한다. 그래서 네이버나 다음 같은 사이트를 들어가 보면, 성탄에 관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로고들로 장식하고는 한다. 그렇지만 그런 로고를 보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라던가, 루돌프, 트리 등등을 장식하는 것은 볼 수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으로 장식하는 것은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시대를 걷고 있다. 이러한 성탄 절기, 즉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치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없는 여러 행사들은 다 속 빈 강정과 같다. 사실 이런 식의 성탄 절기라면 오히려 지키지 않는 것이 좋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과거 개혁자인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러한 성탄 절기를 폐지 하려고 했다. 그 이유는 이 성탄 절기가 다소 미신적이고, 무엇보다도 성경에는 성탄 절기를 지키라고 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어떤 개혁 교회는 우리가 지금 드리는 것처럼 성탄 절기 때에 공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그래서 다소 성탄 절기를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날로 여기기보다는, 자신들만의 휴일처럼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종교개혁 때에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지켜왔던 모습들을 종교 개혁 주일에 따로 기념하는 것처럼, 이 성탄 절기도 그 의미를 잘 알고,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우리는 알고 그것을 실제적 삶 가운데에 적용할 필요가 있겠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서에서 요한은 다른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나 누가와는 다르게 예수님의 탄생 기사를 장황하게 기록하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음을 우리는 복음서 초반부를 보고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할 때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기록했기 때문인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 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이 말씀은 헬라 철학자들 사이에서 많이 쓰이는 ‘로고스’(λόγος)라는 단어로서, 헬라 철학자들은 이를 이성의 원리, 물리적인 형식을 부여하는 주체라고 보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헬라 철학자들의 사상을 따르기보다는 성경의 원리로 이를 바라봐야 할 것이다. 시편 33편 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말씀이 창조 기사 때에 일하셨음을 시편이 기록하고 있고, 이것을 요한복음 1장 1-3절에서도 기록하고 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를 보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① 말씀이 창조의 수단이시며 주체이시라는 것이다.
② 말씀이 계시의 수단이시라는 것이다. 말은 인격적 존재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탁월하신’ 말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보이시기에 그러한 것이다. 이를 우리는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 볼 수 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여기서 ‘나타내셨느니라’ 가 ‘말씀하시다’ 라는 뜻이다.
③ 말씀은 구원의 수단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를 잘 배우고, 알며, 잘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말씀이 언제부터 있었는가 하면 ‘태초에’ 있었다고 요한 사도가 요한복음 1장 1절에 기록하고 있다(말씀의 선재성). 그런데 여기서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함께’ 라는 단어는 영어로는 ‘with’ 라는 단어로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다소 아쉬운 번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래 헬라어 원문 뜻은 그냥 같이 있다는 정도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지향하여 있다는 뜻이다. 즉 성부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류 상태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삼위일체 교리이다. 이는 우리의 이성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범위의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피조 세계 안에서는 이 내용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만한 것은 없다. 어떤 사람이 가정에서는 남편 혹은 아내, 회사에서는 직원, 부모의 곁에서는 아들 혹은 딸로 비유가 된다면 양태론 이단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성부 성자께서 본질은 하난데 위격은 다르다는 뜻이다. 성령님도 그러하시다. 이는 예수님께서 승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설명하실 때에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하신 것으로서 알 수 있다.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는 말은 예수님도 ‘보혜사’라는 뜻을 갖고 있고, 성령 하나님께서도 같은 본질에 다른 위격을 가지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분이 육신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분이 어떻게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장 14절에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여기서 독생자는 ‘유일한 아들’ 이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에 이 ‘독자’가 바로 ‘유일한 아들’ 과 똑같은 말인 것이다. 그러면 왜 아들이라고 불려 지시는가? 이는 성부 하나님에 의해서 출생되어 지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편 2편 7절에 드러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그렇지만 이것은 솔직히 우리의 이해수준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물리적인 출생이 아니라 ‘영원적 출생’ 이라고 표현이 된다.

그런데 요한 사도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전혀 아무런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 그냥 바로 말씀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것이 계시록 19장에도 나타나고, 요한일서 1장 1절에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그럼 이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다 이해할 수 없다. 신성을 가지신 분이 인성을 취하셔서 이 땅에 오셨는데, 그러한 분이 신성과 인성이 섞여서 다른 본질이 되지 않고 있었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이해로 다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것으로 인해서 다양한 이단이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그 첫 번째 이단은 가현설을 주장하는 이단인데, 이것은 신성과 인성이 섞였다고 주장하지 않고, 신성만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인간인 것처럼 나타내 보였다고 주장하는 것으로서, 물질은 무조건 악하기에 신이신 그가 악한 물질인 인간의 육신을 취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서 그냥 인간인 것처럼 가장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예수를 따로 나누어서 생각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인간이 되기는 했는데 지성은 취하지 않았고, 그냥 ‘육체만’ 취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외에도 이런 저런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쟁이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앞에서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이러한 이단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 중에도 아주 경건한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단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 중에도 아주 경건한 이들이 있어서 적당히 알아도 되고 신앙생활에 그냥 열심을 내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옳지 못한 주장임을 말하기 위해서 앞에서 이런 저런 설명을 한 것이다. 우리는 제대로 알고, 제대로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하기 때문에 성경이 기록하는 바를 잘 이해해서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이는 그러면 무슨 뜻인가?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실제로’ 인간이 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성, 지성, 육체, 감정을 다 취하셔서 ‘완벽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분이 신성을 버렸다고 봐서는 안 된다. 이는 골로새서 2장 9절에 잘 나타난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에 거하신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신성에서 인성으로 무슨 전환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계시할 수가 없다. 성부가 계시한 내용을 성자가 계시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분이 신성을 절대로 버리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성육신이 되신 주체는 누구이신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다. 그런고로 ‘자기를 버렸다’는 말은 신성을 아예 내팽겨 쳐버린 것이 아니라 역할과 신분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동등한 하나님이시지만, 늘 이 땅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임재 의식 가운데에서 살아가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성을 입지 않았다고 봐서도 안 된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감정도 가지고 계셨음을 우리는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으로 잘 볼 수 있다. 사도들이 아이를 데리고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오지 말라고 하실 때 화를 내시면서 사도들을 혼내신 것이나, 예루살렘 성전에 온갖 잡상인들이 들어와서 있는 것을 보고 채찍을 휘두르시는 것을 봐도 알 수 있고, 그리고 죄된 실상으로 인해 안타까움으로 슬퍼하시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성령으로 기뻐하시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지도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때로는 성부 하나님의 의지와 성자 하나님의 의지가 달라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는 ‘이 잔을 제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분이 아담의 타락한 육체는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세기 스코틀랜드의 한 목사였던 에드워드 어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육체를 취하셔야만 우리의 죄가 치유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기는 했으나,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했는가? 요한은 말씀이 ‘사람’, ‘몸’이 되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는데, 왜 굳이 ‘육신’이라고 표현 했는가? 이것은 창세기 6장 2-3절을 보면 알 수 있다.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셋의 아들들이 가인의 딸들과 통혼함으로써 육신이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신’을 취하셔서 우리의 죄를 ‘육신’을 취하신 가운데에서 친히 담당하심으로 인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육신을 취하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성은 비우시지 않았기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육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이렇게 친히 인간에게 다가갈 수 있는 신이 되셔서 구원의 도리를 전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죄와 사망의 문제를 빼놓고 논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친히 육신을 취하신 것이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어졌는데, 아담 안에서 타락한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이러한 범죄한 인생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위치에 있으셔야 했으나, 이를 담당하기 위해서는 또 신적 본질이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친히 오신 것이다. 죄의 삯인 죽음을 우리를 대신하여 담당하시기 위해서.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이다. 훌륭한 인간의 업적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냥 계시만 하고, 말씀만 하지 않으시고, 친히 신적 능력을 이용하셔서 이적을 베푸시기도 하셨고, 그렇지만 십자가 아래에서만큼은 인성으로 친히 감당하셔서 천천히 죽어가신 것이다. 우리가 신성을 다 증명할 수 없다고, 신성을 부정할 수 있다는 정당성이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장황한 설명을 한 것이다. 우리는 교리 이전에 이것을 성경에 기록된 ‘사실’로서 믿는 자들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를 인정하고 믿고, 우리의 삶의 경향성이 죄로 치우쳐져 있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아신다는 것을 알아서,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만을 바라보며, 앙모하며, 기대며, 의지하며, 사모하며, 그분께만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된 평안을 모두가 누리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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