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정리

10,691 2016.07.2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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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지만, 정리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올립니다..


16.4.3. 주일 오전 예배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살전1:1-5*****
1.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이제부터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데살로니가전서를 살펴보는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도 이런 저런 문제가 많이 있었기는 했지만, 이 교회에 회심이 뚜렷하고 열매가 뚜렷했기 때문이고, 그리고 말씀 사역을 하는 사람으로서 바울의 모습이 본이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단순히 고상한 신학을 겸비한 채로 겸손치 못하고, 목회 현장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바울은 뛰어난 신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 앞에서 겸손했고, 그리고 성도들을 목회하는 데에 전력을 다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과 이들을 대하는 바울의 모습을 배우는 것은 교회를 세우는 데에 있어서 큰 도전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먼저 데살로니가전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어떻게 편지를 쓰게 되었는지 봐야 한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 여행 이후 2차 전도 여행을 계획 했는데, 이 때 바나바와 바울은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갈지 말지에 대해서 다툼을 벌였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갈 것을 바랐지만, 바울은 이전에 마가 요한으로 생긴 문제로 인해서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지 않을 것을 권했다. 그렇지만 바울도 죄인인 인간이었기에 바나바와 적지 않은 다툼을 벌였고, 끝내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전도 여행을 떠났고, 바울은 실루아노(실라)를 데리고 전도 여행을 떠났다. 이렇게 전도 여행을 하다가 동역자인 디모데를 만났고, 항구를 지나서 첫 성인 마게도냐 지경에 있는 빌립보를 가게 되었다. 빌립보에서의 복음 선포로 인한 결과는 꽤나 긍정적이었던 것을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이후에 빌립보 감옥에 투옥 되었다가 다시 풀려나서 데살로니가 교회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복음을 전했다. 복음을 전한 내용은 사도행전 17장에 잘 나타난다. 그들이 데살로니가에 이르러서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세 안식일 동안 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했다. 이것을 3주라고 볼 수 없는 것은 빌립보서 4장을 보면 알 수 있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에게 두 번이나 쓸 것을 보낸 것을 볼 때에 이것은 단순히 3주라는 기간 동안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고, 이러한 바울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안식일마다 복음을 전한 것을 데살로니가 2장 9절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어찌 됐든 이렇게 복음을 전함으로 인해서 형제라고 부를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데살로니가에서의 복음 전도는 꽤나 긍정적으로 막을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당시에 황제를 숭배하는 사상이 짙었던 유대인들이 소란을 피웠고,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있던 야손의 집에 쳐들어가서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끌어내려고 했는데, 그곳에 그 세 명이 없자 야손과 그 형제들을 끌어내어서 이들이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을 집에 받아들였다고 고소를 했다. 그러면서 가이사의 명을 어겼다고 하면서 그들의 임금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고 하면서 소란을 피웠다. 그렇게 하다가 야손과 형제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그들을 풀어주었고,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는데, 이들이 거기 가서도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거기까지도 쫓아오자 바울은 고린도까지 가게 되었고, 이렇게 급하게 떠나오는 바람에 상실감에 있을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이러한 데살로니가인을 향한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이 부분을 보면 다른 서신서하고는 좀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다른 곳에서는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말했지만, 여기서는 그것과는 다소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오히려 자신의 사도됨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친숙한 친구를 부를 때와 똑같다. 친숙한 친구와 대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주고 받을 때에는 자신의 직함이나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을 소개한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도 그러했던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와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들도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의심을 하지 않고 바울을 사도로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주의할 것은 바울이 이 모든 것을 혼자 담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함께 교회를 세우는 일에 가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로 우리에게 교회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여기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먼저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영적인 정체성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들의 정체성을 이렇게 확인시켜 줌으로써 이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이들이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서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음(살전1:6)을 언급하면서 위로하기 위해서 교회의 영적인 정체성에 대해서 먼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들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봄으로 가능하다. 이러한 내용을 후의 내용을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단순한 동네에 위치해 있는 정도로 끝나는 것은 아닌가? 단순한 지 교회로 남아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닌가? 정말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어떻게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는가? 먼저는 복음 전파로 인해서 가능하게 되었다. 그것이 5절에 나타난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즉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바는 교회가 먼저는 말씀으로 세워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적이나 기사나 상담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본문에서 봐도 알 수 있다시피 복음은 단순히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5절에서 나오는 ‘말로만 아니라’라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는 그 당시의 랍비들과 같은 거짓 선생들이 하는 말과는 차원이 다른 말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왜 차원이 다른 말인가? 그것은 이 말이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이른 말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우리가 또 알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은 말씀과 독자적으로 우리에게 임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 충만하다고 말할 때에 그것은 단순히 무슨 신비한 이적적인 경험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께서는 말씀과 함께, 충만하게 우리의 전인에 임하신다. 이어지는 말로 이러한 것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그런데 이 본문에서 가질 수 있는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 왜 ‘능력’이라는 단어가 먼저 나오는가? 이는 무슨 신비한 능력을 말하는가? 아니면 세상적 능력을 말하는가?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2장 4-5절을 보도록 하자.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즉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표적 그 이상의 능력, 즉 우리를 ‘믿게 하시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표적 자체가 우리에게 믿음을 불러 일으킬 수는 없다. 그 예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아니었는가? 오히려 우리에게 믿음을 부어주시는 그 하나님의 능력만이 곧 표적 그 이상의 능력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복음을 믿게 된 것보다 더 큰 능력은 없는 것이다. 한 번도 우리의 눈 앞에 보지도 못했고, 만나보지도 못한 하나님을 믿게 하시고, 그 분을 위해서 우리의 전인을 바치게 하시는 그 믿음은 우리의 이성적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그 능력으로만 말미암아 되는 일이다. 그렇기에 목회자는 자신의 아름다운 말의 어떠함으로 하지 아니하고, 감정적 어떤 것으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그 크신 능력에 의존하게 되니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성도들 또한 기도하지 않고 예배에 나아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무조건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오늘도 말씀을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시지 아니하시면 들을 수 없다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오는 ‘큰(온전한) 확신’은 무엇인가? 이는 바울의 설교에 반응을 보인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습이다. 말씀을 들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을 통해서 전해 들은 그 복음에 큰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본문을 보도록 하자.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이는 즉 복음을 전하는 자의 인격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즘 삶과 설교가 분리된 시대를 걷는다. 복음을 들을만한 곳은 많고, 인터넷도 발달 되어서 복음을 언제든지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왜 참된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가? 왜 이전보다 성도들은 하향 평준화가 되어가고 있는가? 설교는 설교자의 인격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삶이 뒷받침 된 목회자의 설교만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내는 신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신학을 논하면서 다른 지체들을 칼질을 할 수는 있을지언정, 신앙은 없는 거짓 성도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복음을 받음으로 어떠한 결과가 일어났는가? 즉 이들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게 되었는가? 아까 앞에서 뒤로 미뤄놨던 이야기를 지금 본문을 보면서 해보도록 하자.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이들이 이러한 복음을 받음으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그러면 먼저, 믿음의 ‘역사’란 무엇인가? 여기서 역사라는 단어는 ‘행위’를 가리킨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믿음은 단순한 지적인 수긍으로 끝나지 않는다. 단순히 역사적이나 이적적으로 믿음의 어떠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단순히 고개 끄덕이면서 그랬다는 정도로 끝나지 아니하고 믿음은 반드시 모종의 행위를 만들어낸다. 믿음은 하나님께 대하여 합당하게 반응하고 살아가게끔 우리를 인도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삶의 이유가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고, 무조건 하나님을 위해, 이웃의 필요를 위해 살아가게 된다. 복음이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과거에 당신이 이랬지 않았냐?”, “당신이 그렇게 하면 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하는 식의 자기 체면만 내세운다면 그것은 곧 믿음 없음의 증거이다. 이러한 믿음은 필연적으로 ‘사랑의 수고’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사랑에 속한 자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서부터 사랑이 나온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인격적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비인격적이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개만도 못한 존재와 같다는 소리를 듣거나, 혹은 개만도 못한 가식적 사랑을 우리 앞에 보이면 우리는 인격적으로 반응을 하게 된다. 인격적으로 쫓아서 하지 아니한 모든 것을 다 싫어하기로 우리는 작정되어 지어진 자들이다. 이러한 사랑은 절대로 정서만을 수반하지 않는다. 그냥 좋으면 사랑하고 내 마음에 안 내키면 싫어하고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어서 이웃을 사랑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의지적 결단이 뒤따르게 된다. 그렇기에 사랑은 단순한 정서적 감정만을 우리에게 불러오지 아니하고, 그 이상의 ‘사랑을 동반한 육체적인 수고’를 동반한다. 즉 의지적 사랑을 동반한다.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떻게 했는가? 이러한 수고로 본을 보였다. 그렇기에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기 위해서는 ‘수고해야’ 한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얼마나 사랑의 수고로 본을 보였는지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살전4:9)
그리고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는 소망으로 인내했다. 이 소망이 얼마나 크면 바울은 로마서 8장 24절에서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어떤 성격이 있길래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까지 말하고 있는가? 믿음으로 인한 소망은 인내를 만들어낸다. 이 소망은 막연하지 않고 소망의 내용이 아주 분명하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무엇인가? 전적으로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소망이다. 이 소망의 내용이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에 나온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이러한 소망이 있는 자는 ‘무조건적으로’ 인내한다. 이 인내는 단순한 체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믿음, 소망, 사랑은 절대로 따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제 자아추구를 버리고 지체를 위해서 수고해야 한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본받으라. 이들은 자신에 대해서 안주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지체를 위해서 수고했다. 우리도 이를 쫓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바울은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 열매가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를 보고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즉 복음을 깨달아가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붙들고 마지막 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악인과 의인이 부활하여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우리 교회가 천상교회로, 하늘 시민권자의 모임으로 판명 나기를 소원한다.



16.4.10. 주일 오전 예배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살전1:6-10*****
6.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사역자와 말씀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교회의 건강과 기초를 이루는 것은 복음이다. 그런데 5절에서 이 복음을 ‘우리 복음’이라고 말하면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는 곧 디모데와 실루아노와 사도 바울이 각각 전한 복음이 다 다른 복음이 아니라 그 복음이 객관성을 띠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고로 이것으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내용이 사람마다 다르지 않고, 복음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복음’임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복음을 들을 때에 무슨 다른 새로운 내용을 말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져서는 안 되고, 그리고 전하는 자도 자기 나름대로 특별한 복음의 내용을 전해서는 안 된다. 그럼 이런 복음을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떻게 받았는가? 그것이 6절에 나타나고 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이것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는 복음을 받을 때에 상당한 고통과 어려움이 따르지만,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만한 기쁨이 우리에게 같이 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쁨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다.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뭐 세상적인 기쁨이 아니다. 이는 ‘성령의 기쁨’이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정한 신자라면 절대로 포기하지 아니하고, 비록 고난과 어려움이 닥치기는 하지만, 그것을 더 큰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프랑스 개신교도들을 위그노라고 한다. 이 위그노들은 종교 경찰에 의해서 수만 명이 학살 당했다.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기록 중에 하나는 위그노들이 종교 경찰에게 잡혀가면, 종교 경찰들은 의자에 위그노들을 묶어 놓고 산 채로 배의 가죽을 벗기고 창자를 빼내는 그러한 일을 감행해서 위그노들은 말 못할 고통을 겪었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종교 경찰에 의해서 잡힐 지경에 처했을 때에 하수구에 빠진 종교 경찰을 구해주다가 순교를 당한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이들은 그러면 어떤 이유 때문에 이렇게 견뎠는가? 앞에서 말한 그 기쁨이 더욱 컸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을 더욱 자세히 말해주는 본문이 히브리서 10장 34절에 나타난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이와 같이 우리가 누릴 마지막 심판 날의 기쁨과 지금 현재 겪는 그 기쁨을 아는 사람이라면, 즉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큰 지 아는 사람이라면 모든 핍박을 견딜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이러한 일에 참여한 자들이었다. 그러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가? 돈 좀 안 벌리면 하나님 탓하고, 조금 자기가 좋아하는 일 있으면 바로 교회 안 나오고, 자기 마음대로 이런 저런 결정을 내리고 등등, 이러한 일들을 하지는 않는가? 이들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나오는 예 중에서 바위에 씨가 뿌려진 자들과 같다. 뿌리가 내려지는 것 같지만, 그 바위는 단단해서 그곳에 뿌리를 다 내리지 못하고, 조금만 환난이 닥치면 바로 나자빠지는 그러한 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자들은 작은 어려움만 닥쳐와도 바로 복음을 밀어낸다. 그렇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그 가운데에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은 자의 어떠함을 충분히 드러내었다. 이러한 본을 먼저는 바울이 보였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투옥 되었을 때에 오히려 기쁨으로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감옥이 무너져 내려서 감옥이 빠져 나옴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에 가서 복음을 전한 것이다. 이에 데살로니가 교회도 함께 그 복음에 참여한 자가 되었고,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살전1:6)
그런데 여기서 의아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주를 먼저 본받고 사도의 일행을 본받아야 할 거 같은데, 오히려 그러한 순서가 아니라, ‘우리’가 먼저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원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저를 본받는 자가 되십시오. 제가 주를 본받는 자가 된 것처럼.”
즉 이 말은 복음을 선포하는 자가 말로만 복음을 선포하지 않고, 그 행동과 용모와 마음과 말투 등의 모든 것으로 복음의 어떠함을 증거했다는 것이다. 한 인격체로서 복음을 전한 것이다. 설교는 설교자의 인격과 관련되어서 성도들에게 전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 먼저라는 말은 아니다. 먼저는 말씀이 필요하다. 먼저 말씀을 받고 주를 본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말씀이 설교자의 인격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설교자는 이러한 말씀을 전할 때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어떠함을 증거 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거룩한 부담감을 가질 필요는 있겠지만, 너무 큰 부담감을 가져서는 또 안 된다. 왜냐하면 ‘본받으라’는 말은 “내 삶과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식하며 나를 본받으라”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는 사도 바울의 교만이 아니다.
그러면 사역자만 주를 본받으면 되고, 성도는 주를 본받지 않아도 되는가? 그렇지 않다. 성도들이 주를 본받아야 다른 이들이 주를 본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이런 사람으로서 모두의 곁에 서있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어떠한가? 요즘에 얼마나 복음을 입으로만 전하는 자가 많은가? 머리에 든 것은 아주 많다. 인간의 이성이 왕 노릇 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머리의 지적 수준은 상당히 높아졌다. 그렇지만 그러한 높은 지적 수준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 하는가? 헌신은 하지 않는다. 사랑의 수고가 없다. 그냥 우선 전하고, 그 사람이 상처를 먹든 말든, 그냥 전하고 보는 것이다.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빼지도 않은 채 형제의 티만 보면서, 나름 복음이라는 것으로 정당화 시킨 채로 형제를 마구잡이로 휘갈겨 놓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 전도가 되겠는가? 그렇지 않다. 복음 전도가 얼마나 잘 되었는지는 복음 전도를 받은 자가 얼마나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는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복음의 진리는 단순한 지적 수긍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주가 우리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그런 주가 부활했다.” 정도로 끄덕이고 끝난다면 그것은 단순한 찬동 수준에 불과하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자. 이 교회는 단순한 지적 수긍에 끝나지 않고, 사도 바울의 일행과 주를 본받는 자가 되어서 7절에서 말하는 바대로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자주 저지르는 실수가 무엇인가 하면, 교회 일을 핑계로 세상에서 하는 일에 대해 소홀한 것이다. 어떤 일이 생기면 “제가 교회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합니다.” 하고 끝낸다. 일은 저질러 놓고서 그 일에 대한 책임은 회피한 채, 그 일을 남에게 다 떠맡겨 놓고, 나중에 와서 “죄송합니다.”하고 입 닦고 끝내면 되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적어도 이러라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시지 않으셨다. 남 등쳐먹고, 남 써먹으라고 구원하시지 않으셨고, 높은 이성 가지고 온갖 궤휼을 꾸미라고 이성을 주시지 않으셨고, 고등한 정서를 상대에게 분을 내라고, 성적 감각을 왜곡되게 가지라고 주시지 않으셨다. 이런 어리석은 삶은 신자의 삶이 아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즉 말씀 사역자가 떠났음에도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될 정도로 신자의 열매를 맺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문이 각처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원인은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8절에 드러난다.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이것은 필시 자기를 향한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다. 자기를 향한 믿음은 필연적으로 성경적 믿음이 아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이 소문의 내용은 무엇인가? 첫 번째는 “어떻게 우리가 너희 가운데로 들어갔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는 사도 바울의 일행을 환영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긴 내용이다. 이를 ‘회심’이라고 한다. 회심은 한 번 잠깐 눈 돌려주는 것이 아니다. 한 번 잠깐 감동먹는 것이 아니요, 한 번 잠깐 눈물 짜는 것이 아니다. 한 번 잠깐 기도 잘 되고, 한 번 잠깐 말씀 집중해서 읽는 것도 아니다. 회심은 분명한 증거가 있다. 분명히 돌아서는 그 증거가 우리에게 드러난다. 만약에 입을 열 때마다 자신의 어떠함을 말하고 있다면 이런 자들은 필시 하나님을 향한 자가 아니요, 자기를 향한 자이고, 이런 자들은 우상 숭배자들이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있었던 이 당시의 시대는 황제 숭배 사상이 만연했던 시대였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만신전이라고 해서 신전 안에 온갖 신들이 다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의 일행을 보면서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라고 하면서 고소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이 천하를 어지럽힌다고 말했다는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확실히 돌아섰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요즘 시대의 우상은 무엇인가? 요즘은 뭐 목석을 만들어 놓고 절을 한다거나, 동물 우상을 만들어 놓고 제사를 드리고 하지는 않는다.
이 시대의 우상은 다음과 같다. 먼저는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는, 먼저는 세상에 득실득실하다. 이런 자들은 필연적으로 자아의 추구를 위해서 인생을 산다. 내가 뭐가 될 것마냥 살아간다. 내가 뭐라도 되고, 내 자존심이 구겨지지 않고, 내가 잘 되어야 하고, 남은 어떻게 되든 내가 우선 세워지면 끝나는 것이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회를 다닌다고 말하면서 만약에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필연적으로 어떤 일을 할 때 자기가 드러나지 않으면 낙심하고 넘어진다. 그리고 화를 낸다. “내가 한 것은 왜 알아주지 않는가?”, “내가 이 정도는 하지 않았는가?”, “너희는 이렇게 하지 않지 않았는가?” 이러한 반응들이 다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는 거짓 신자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섬기는 자, 즉 자기를 버린 자는 자기 하나 버려지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다. 자기를 희생하여 타인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그 채워주는 행위조차 주께로부터 왔으니 주께 영광을 돌린다. 우리는 조금 밟혀도 된다. 우리가 원래 본성상 죄인이고, 타인과 똑같은 죄인인데, 죄인이 좀 밟히면 어떠한가? 그리스도만이 드러나면 된다.
그리고 두 번째 이 시대의 우상은 ‘성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경쟁 사회에서 다 때려부수고 자신만이 독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도 그렇다. 교회도 타 교회가 어떻게 되든 자기 교회만 헌금 많이 해서, 복지 잘 하고, 구제는 하지도 않고, 자기만 잘 살고, 타 교회가 나자빠지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것이다. 초대 교회는 어떠했는가? 초대 교회도 그러했는가? 그렇지 않다. 초대 교회는 재정을 모으기는커녕 그 재정을 다른 교회에 보내서 서로 연락하는 삶을 살았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여,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행2:44-47)
그리고 또 하나의 우상은 ‘돈’이라는 우상이다. 요즘 시대의 사람들은 거의 다 이 우상에 걸려 넘어진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다시피 탐심은 우상 숭배다. 돈을 섬기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성경에서 우상을 섬기는 자는 우상과 같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돈을 섬기는 자들은 돈과 같이 된다. 그냥 한 번 쓰고 없어져 버릴, 일회용으로 쓰이고 말 존재가 된다. 돈이 얼마나 남느냐, 돈이 얼마나 벌리느냐가 중요한 것으로 작용하여 모든 사고 체계가 이쪽으로 쏠리다 보니 어떻게 되는가? 사람도 이와 같이 다루는 것이다. 그 사람의 인격이 어떻게 되든 간에 말 그대로 개처럼 사람을 다루는 것이다. “네가 어떻게 되든 우선 돈부터 벌고 보자” 이것이 요즘 사람들의 사상 아닌가? 아주 단순하고 무지하고 극악무도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교회도 그러하다. 교회는 헌금을 모으는 보물 창고가 아니다. 헌금 모아 놓고 우리 교회 재정이 어떻다고 자랑하면서 어깨 치켜 세우면서 다니는 자들이 성도가 아니요, 목사가 아니다. 헌금을 어떻게 쓰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얼마나 가치 있게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또 이 시대가 따르는 우상은 ‘성’이라는 우상이다. 이 성이라는 우상은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몸’에 죄를 범한다. 여자를 하나의 동물로 취급하고, 남자를 하나의 짐승으로 취급하는 것이 요즘 시대이다. 성이 상품화 되어 있어서 몸매가 좀 잘 빠졌다 싶으면 남자들은 발정난 개처럼 달려든다. 그런 여자들을 보면 자신들의 성적 욕구에 못 이겨서 발정난 개마냥 헐떡거린다. 그렇다보니 외모 지상주의 시대에서 외모가 좀 출중하지 못 하면 인간을 짓밟는다. 어느 쪽이든 이성을 동물처럼 여기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그리고 그렇게 여기는 본인 또한 동물처럼 사는 것도 매한가지이다. 성은 이러라고 주시지 않으셨다. 성은 결혼 관계 안에서 부부간의 사랑의 끝을 나누라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자손을 더욱더 넓혀가기 위한 지경으로서 주신 것이 성이고, 부부간의 큰 사랑을 더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인간의 한계 내에서, 사랑의 표현의 절정으로, 크나큰 기쁨을 부부 관계 안에서 충만하게 누리게끔 하시기 위해서 주신 선물이 성이다. 이성끼리 서로를 향해서 짐승처럼 다루라고 성을 주시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또 하나의 우상은 무엇인가? ‘권력’이라는 우상도 있다. 세상 사람들도 그럴 뿐더러 교회도 이 권력에 미쳑고 있다. 교회는 필연코 권력을 한 곳으로 모아서는 안 된다. 교회는 담익목사에게 권력이 있지 않다. 그래서 ‘회’에 권력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우상으로부터 돌아서야 한다. 돌아서서 줏대 있는 신자의 모습을 우리가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배워서 일상의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 그냥 배우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설교는 끝내주는 강연으로 끝나고, 신자도 그냥 세상으로 끝난다. 우리가 이 냄새를 풍겨서 우리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게끔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우상을 멀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을 10절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진노는 그렇게 단순한 진노가 아니다. 아주 큰 진노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만한 큰 진노가 임한다. 하나님의 그 능력만큼 크나큰 진노요, 무한한 진노가 이른다. 이 진노는 지금 오고 있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5:6)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2:5)
지금 바로 하나님의 진노의 수위는 점점 차오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 그러한가?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께서 있으시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를 다 포함한다. 이전에도 건지셨고, 지금도 건지시고 계시고, 앞으로도 건지실 것이 확실하다. 그 마지막 심판 날에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신자는 바로 이 날을 사모하는 자들이기에 환난과 핍박이 닥쳐와도 믿음으로 이기고,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날 우리가 흘린 눈물이 주의 잔에 담겨 낱낱히 보고될 것이다. 우리가 지은 죄도 보고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죄를 당하지는 않는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세상을 그리스도와의 결혼식장으로 데려가는 마차로 비유했다. 신자는 바로 이 믿음을 갖고 사는 자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인 그 날만을 바라보고 사는 자인 것이다. 세상의 어느 지점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다. 내일 무엇을 할 것인가, 미래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심판 날에 부를 그 찬송의 기쁨을 생각하며 오늘의 현실을 사는 자이다. 그렇다고 현실 도피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내세에 대하여 가장 많이 생각하는 자가 지상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C.S. Lewis가 말했다. 재림에 대한 분명한 믿음은 희미한 그곳을 선명하게 보게하고, 선명한 물리적인 세계를 흐리게 보게 한다.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알다시피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운만큼 더 선명하게 보인다. 우리에게 있어서 더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 천국인가? 지옥인가? 우리는 무엇이 크게 보이는가? 신자는 부활의 권능에 사로잡혀 사는 자이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로 이 믿음을 갖고 산 것이다. 우리도 어때야 하겠는가? 이 믿음을 고수하고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주께서 지정하신 때(이 때는 모든 피조물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가 오면, 또 선택된 자의 수가 찰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가지고 보이게, 즉 그가 크신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승천하셨듯이 하늘에서 오셔서 죽은 자와 산 자의 심판을 선포하시며, 세계를 정화하기 위하여 불과 불꽃으로서 이 낡은 세계를 태워버리실 것을 믿는다. 그때에 남자와 여자와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듣고 모여 들어서 세상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신 대 재판관 앞에 직접 나타날 것이다. 모든 죽은 자들이 땅에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영혼이 전에 있었던 본래의 몸들과 연합될 것이다. 그때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었던 사람처럼 죽지는 않을 것이되 순간적으로 변하여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는 책들(즉 양심들)이 펼쳐지고 죽은 자들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이 세상에서 그들이 행한 일에 따라 재판을 받을 것이다. 아니, 모든 사람이 세상에서는 한갖 오락과 농담으로만 간주되던 자기들의 쓸데 없는 말에 관하여 일일이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 그때 사람들의 비밀과 허위가 드러나서 모든 사람들 앞에 공개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재판을 생각한다는 것은 악한 자와 불신자들에게는 바로 무서운 것이지만 의롭고 선택된 자들에게는 가장 바람직하며 통쾌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그들의 완전한 해방이 성취될 것이며, 그들이 짊어졌던 노고와 고난의 열매들을 거둬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결백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질 것이며 이 세상에서 그들을 가장 잔인한게 박해하고 압박하고 괴롭혔던 악인들은 하나님이 처벌할 무서운 보복을 받을 것이다. 또 그들은 자기들 양심의 증거에 의하여 고발될 것이며, 또 불멸할 것이므로 악마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에서 고통 받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신실하고 선택된 사람들은 영광과 영예로써 보답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그가 택하신 천사들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밝힐 것이다. 모든 눈물이 그들의 눈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지금 많은 재판관들과 집정관들에게 이단을 정죄된 사건들이 그때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위한 것으로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은혜로운 보답으로서 주께서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한 영광을 그들이 가지도록 만드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위대한 날이 와서 드디어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충분히 즐길 수 있기를 가장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한다. 주여 오소서.
–벨직 신앙 고백서 : 제 37조 최후심판에 관하여





16.4.17. 주일 오전 예배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살전2:1-8*****
1.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3.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4.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6.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7.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만약에 우리에게 사도 바울의 서신서가 없었고 복음서만이 성경에 들어와 있었더라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그러한 사실을 아는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뜬구름 잡는 신앙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서신서가 성경에 자리 하면서 우리에게 실질적인 부분을 알려주는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되었다. 2주 전부터 살펴보고 있는 데살로니가전서도 그러하다. 그런데 이 서신서, 즉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써 보내는 편지는 교리를 다루는 로마서나 교회 문제를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일을 처리하여 알려주는 고린도전서랑은 성격이 다른 서신서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어떠한 문제가 있거나 데살로니가 교회에 어떠한 교리를 말하는 것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저번에도 살펴봤다시피 급하게 데살로니가를 떠나오면서 일어났을 여러 가지 근심과 생각에 대해서 정리를 해주고, 알려주고,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오늘 본문도 이러한 내용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런 저런 사소한 내용들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변명처럼 보이는 내용들을 쭉 나열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시시콜콜한 내용들을 다 말하고 있으니 변명을 하는 것만 같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이에 대해서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서신이 어떤 배경 하에 써졌는지를 봐야 한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 바울 일행이 복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데살로니가 교회에 형제라 부를만한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당시에 황제 숭배 사상이 짙었기에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 일행이 머물렀던 야손의 집에 찾아가서 사도 바울 일행을 끌어내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없자 야손과 그 형제들을 끌어내어서 이들이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자기들 집에 묵게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들이 잡혀갔는데, 그 형제들이 보석금을 주고 풀려나고 나서 급하게 사도 바울 일행을 베뢰아로 보내게 된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 입장에서는 ‘이들이 그렇게 복음만이 살길이라고 전했는데, 어찌하여 핍박이 닥치니깐 그냥 도망이나 치는가?’ 하는 생각이 있었고, 이러한 비난을 인식한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보내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살피게 했고, 디모데가 돌아와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것을 사도 바울에게 들려주자 자신이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했는지에 대해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보면서, 목회자, 크게는 복음 전도자의 자세를 볼 수 있다. 어떠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어떠한 특정한 행동에 대해서 의심을 취할 때,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교정할 필요가 있음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바울도 그러했다. 바울은 이러한 소식을 들었을 때에 이를 부정적이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인격을 통해서 복음의 근간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2장 2절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 복음 때문에 투옥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감옥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오게 되고 나서 그냥 복음 때문에 갇혔으니 이제 그런 수고는 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오히려 사도 바울은 더욱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데살로니가를 떠난 바울도 이 당시에 그러한 핍박이 겁나서 떠난 것이 아님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복음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전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복음을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전한 것이 전혀 헛되지 않고, 열매가 있었음을 2장 1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그럼 이렇게 고난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2장 2절에서 나타나는 바대로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전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힘입어’라는 말은 ‘담대하게’라는 말이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왜 담대할 수 있었는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했기 때문이고, 하나님 앞에서 담대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인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신앙 생활의 핵심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 담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도 바울의 본을 받아서 우리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점검 받을 필요가 있다. 아무도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고, 알지 못할지라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했다. 이러한 자세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열매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자세로 복음을 전했는가? 그것이 3절에 나타난다.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여기서 ‘간사함’이란 잘못된 가르침을 말한다. 즉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어떠한 가감 없는 하나님의 복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부정에서 난 것’은 다른 어떤 동기로서 무엇을 하는 것을 뜻한다. 즉 사도 바울은 다른 어떤 동기가 아니라, 순수한 동기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리고 ‘속임수’는 사람을 꾀는 것이다. 요즘 전도 때에 무슨 경품 행사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교회를 무슨 백화점으로 만들고, 시장터로 만드는 것과 똑같다. 교회는 절대 복음을 도구로서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복음 때문에 존재하지 복음이 교회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사도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복음 전하는 자가 어떠한 자여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복음 전하는 자는 ‘진리를 말하는 자’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가벼워서는 안 되고, 회중을 기쁘게 하려 해서는 안 된다. 복음이 희석되는 이유는 회중을 너무 고려한 나머지 복음의 내용을 가감해서 그런 것이다. 너무 풀어서 설명하는 일에만 집중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복음의 내용을 다 전하지 않아서도 안 된다. 그렇기에 성도들도 말씀을 들을 때, 자기 수준에 맞춰달라고 떼 써서는 안 된다. 성도들이 상향 평준화 되어야 하지, 복음이 하향 평준화 되어서는 안 된다. 성도들도 신앙 생활에 집중하여 살아가야 하고 말씀을 더욱 배우고 알아가고 하나님의 복음을 믿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하는 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자의 기본 자세로서 틀려먹은 것이다.
오늘 또 우리가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부분은 사도 바울이 3절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권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복음은 선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권면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성령님의 별명을 우리가 보혜사라고 부르지 않는가? 보혜사는 곁에서 위로하고 권면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이와 같이 명하지 않고, 오히려 권면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써 보낸 내용에도 이러한 내용이 담겨있다. 빌레몬서 8-9절을 보자.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복음 전도자에게는 이러한 것이 필요하다. 어떠한 거짓이 없이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으로 권면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와 같이 써서 복음의 순수성과 목회자의 자세를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변증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5-6절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여기서 ‘아첨’은 악이 있는데 좋게 말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다 이 아첨에 중독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이 아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먼저는 인간의 죄 된 실상을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너무 또 사람을 휘갈겨 놓으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죄의 지적과 회개의 촉구를 균형 있게 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탐심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됨으로 옷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치장하고, 더 가지려고 하고, 그 외에도 온갖 것들에 대한 탐심이 불일 듯 하다면, 그것은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영광으로 옷 입지 않은 인간의 비참함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존재가 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전혀 하나님의 계산대에 올라가지 않을 것처럼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우상처럼 숭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명예욕과 탐욕도 복음 전도 때에 조심해야 하는 부분인 것이다. 그리고 또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영광이란 어떠한 사람의 뛰어난 것을 뜻한다. 우리가 누구에게서 칭찬을 받을 때에 이것을 너무 거부하는 것도 안 좋은 것이다. 그것을 준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영광을 돌리면 된다. 그런데 너무 또 이것에 치우쳐서 이러한 자신의 영광을 얻으려고 복음을 전해서는 안 된다. 외식의 척도는 그 사람이 헛된 영광을 구하느냐로 볼 수 있다.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런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칭찬, 아첨에 중독되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이 말을 마치고 계속 변증하는 말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변호한 것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이러한 말을 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왜 자기에 대해서 굳이 말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것은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복음 전도와 그 전도자의 인격이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을 효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서 이러한 말을 덧붙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7-8절로 ‘겸손’이라는 덕목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우선 사도 바울은 이러한 덕목을 주장하기 위해서 자신이 사도로서 어떠한 권위를 주장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충분히 사례를 받으면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으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복음을 전했다. 그러면 왜 사도 바울이 이렇게 했는가? 복음의 영광이 손상되지 않게 하게 위함이었다. 복음에 사도 바울 자신이 걸림돌이 될까 두려웠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가감하지 않고, 동기, 내용, 자세,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어떠한 불순한 것을 가지지 않고 복음을 두려움으로 전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유모의 비유를 든 것이다. 유순함은 겸손함과 온유함과 인내로부터 나온다. 말의 어투나 억양에 어떠한 가시가 없이 유순함으로 그들을 기르는 것과 같이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렇기에 유모라는 비유를 든 것이다. 그런데 왜 2장 11절에서 아비가 자녀를 기르는 것과 같이 했다고 하는 것처럼 어미가 자녀를 기른다고 하지 않고, 유모가 자녀를 기르는 것과 같이 했다고 하는가? 유모는 다른 사람의 아이를 기를 때에도 주의하고, 자신의 아이를 기를 때에도 그 힘든 몸을 이끌면서도 주의하여 기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이와 같이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순함이라는 것을 잘못 이해해서 그냥 다 봐주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복음 전도자는 목숨을 바치기까지 헌신해야 하는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성도가 쓰라린 죄에 시달리고 있으면, 자신이 그 죄를 겪은 자로서 쓰라림과 눈물과 두려움과 소망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권면하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이고 한 영혼을 붙들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다. 만약에 이런 자세가 없으면 목사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성도들이 이러한 내용을 갖추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또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목사도 설교의 내용대로 살아가야 하고, 성도도 들은 설교의 내용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를 바울이 어떻게 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까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양육하게 되었는가? 그것이 4절에 나타난다.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즉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이었다. 사도 바울이 오로지 하나님의 부르심에만 집중해서 살았기 때문이고, 그리고 사도 바울이 아는 그 지식은 단순한 신학적 지식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으로 인해, 자신의 삶에서 깊게 경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내 앞에 계신 것처럼 삶을 살아야 한다. 삶에서 죽어가서는 안 된다. 이 신앙을 견지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모든 상황 가운데에서 그래야 하는 것이다. 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말을 하든, 옷을 입든, 누워 자고 깨든, 모든 일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4:1-5)






16.4.24. 주일 오전 예배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살전2:9-12*****
9.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10.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1.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전한 복음으로 인해서 형제라 부를만한 이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들의 열매를 칭찬하는 내용을 말했다. 즉 1장에서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편지를 진행해 나갔다. 그런데 2장에 들어오면서부터 바울이 사도 바울의 일행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이런 저런 변증을 해 나가는 것을 우리가 살펴보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그 당시에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서 자신에 대한 비난을 인식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살펴봤다. 오늘도 여태까지 해왔던 변증에 이어서 지속적으로 변증을 해 나가고 있다. 본문 처음에 9절에서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이는 즉 이들이 수고하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수고는 육체적 수고도 있지만 정서적 수고도 동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왜 바울이 굳이 이렇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도 수고하면서 복음을 전했는가? 교회를 세우는 유일한 수단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요즘 조국 교회의 형편은 어떠한가? 온갖 프로그램과 시스템이 교회를 이루는 기초가 되지 않았는가? 교회 한 번 세웠다고 하면 옆의 교회가 하는 프로그램과 시스템을 그대로 복사해서 갖다 놓고 교회를 이뤘다고 하는 형편이 요즘 조국 교회의 형편이 아닌가? 데살로니가 교회가 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을 전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은 복음을 ‘합당한 자세’로 전했다. 사도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것이 데살로니가전서 2장 7절과 데살로니가후서 3장 8절에 잘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나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살전2:7)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살후3:8)
그러면 사도 바울이 왜 사도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면서까지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는가? 그것은 사례를 받는 사람과 안 받는 사람의 차이점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 당시에 순회 전도자들이나 세상의 초등 철학자들이 자신들이 전한 메시지를 갖고 돈을 버는 수단으로 삼았었는데, 바울은 그러한 자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리고 복음은 그러한 값으로 지불할 수 없을 만한, 크나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즉 복음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목사는 교회에서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니다. 사례비를 받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복음이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 근래 들어서 돈을 덜 받는 목사가 아주 큰 이슈가 되고 있다. 어리석음의 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라고 이슈화를 하는가? 물론 이것을 진심으로 실천하는 분들도 있긴 하다. 그런 분들에게 있어서는 존경을 표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이러한 것을 자신의 도덕적 순수성을 자랑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것에 대해서 옳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절대로 자신의 도덕적 수준을 자랑하기 위해서 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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