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본성의 4중상태 - 독후감/내용요약

12,534 2016.08.11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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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본성의 4중상태 - 독후감



청교도 신학자들의 저서들을 읽으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한다.
그들은 성경이라는 바다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 올린다.
그런데 그들은 육지 근처의 얕은 바다에 배를 띄우고 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다.
바다 가운데 깊은 곳을 찾아가서 그물을 내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얕은 바다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신비하고 풍부한 고기떼들이 살고 있다.
또한 그들이 내리는 그물은 매우 촘촘한 그물이다.
그 그물은 가로세로로 잘 짜여져 있고 튼튼하며 찢어진 곳이 없는 그물이다.
찢겨져 있거나 낡은 그물로는 많은 고기를 잡아도 다 빠져나가 버릴 것이다.
그들은 배를 띄울 때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풍성한 고기를 잡아 올린다.
토마스 보스턴의 “인간 본성의 4중 상태”는 오랫동안 성경의 바다 깊은 곳에서 그물을 던졌던 노련하고 성실한 어부가 잡은 싱싱한 고기들로 가득하다.
그는 자신의 생존의 근거인 바다를 잘 알고 있다.
고기 떼가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하는지, 어디에서 머무는지, 언제 활발히 움직이는지, 어떤 정도의 수심까지 그물을 내려야 하는지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꿰뚫어보고 있다.



이 책은 ‘인간본성의 상태’가 창조로부터 종말까지 어떻게 변화되어 가고 있는지를 모티브로 하나님의 구속사를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성경의 가치와 오묘함을 더욱 분명하고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인간의 본성을 죄를 지을 수 있는 무죄상태에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본성의 상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은혜의 상태(중생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죄를 지을 수 없는 영원의 상태로 구분하면서 저자는 놀랍도록 오묘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치밀하고 촘촘하게 설명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기록된 성경말씀이 마치 베틀에서 옷감을 짜기위해 쉼없이 왔다갔다 하는 날줄과 씨줄처럼 끊임없이 서로 엮어지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라는 신비한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집을 짓는 재료로서 각각의 역할과 기능을 가지고 서로 연락하고 상합하고 있었다.
기록된 말씀이 인간의 지혜와 재능으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간의 이쪽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치밀하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뜻, 구원의 섭리를 드러내고 계시하기 위해 쓰여진 것임을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비록 나의 이해력과 깨달음의 영역을 넘어선 신비에 속한 하나님의 섭리의 영역이 있음도 부인할 수 없지만 어두운 이성을 눈부신 빛으로 밝히시고 그 빛으로 인해 나의 이성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이해의 영역 밖에 대해서는 하나님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주심으로 겸손히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시는 은혜를 허락하셨다.


이 책을 여러번 읽으면서 내 안에 진리의 집의 기둥과 들보가 세워져 가는 즐거움을 느꼈다.
성경말씀 속에는 문맥 속에서 단어와 문장의 해석에 의존하여 읽어서만으로는 깨닫지 못했던 빛나는 계시가 있음도 알게 되었다.
이 계시의 빛이 밝아지면 질수록 나 자신에 대한 신뢰는 점점 줄어들고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의뢰는 점점 더 커져 갈 것이다.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 라는 70년대 팝송이 있다.
노란 손수건이라는 단편소설로도 회자되었는데 남편이 절도죄로 3년을 감옥에서 복역하고 출소하기 전 아내에게 편지를 보낸다.
나는 당신의 남편으로서 당신 앞에 설 자격이 없지만 만약 당신이 날 용서하고 받아준다면 그 표시로 기차가 지나가는 마을 역 앞에 서 있는 오래된 떡갈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매달아 달라고 부탁한다.
만약 노란 손수건이 매달려 있지 않으면 부부의 관계는 깨어지고 두 사람은 영원한 이별을 고하게 된다.
남편은 초췌한 모습으로 홀로 기차를 타고 떨리는 마음으로 마침내 고향 마을 역 앞을 지나간다.
마침내 고향 마을 역이 저 멀리 보일 때 쯤 기차 안의 모든 승객이 큰 소리로 환호하는 소리가 들린다.
창 밖을 내다본 순간, 기차역 앞에 서있는 나무 나무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노란 손수건이 바람에 너울거리고 있었다.



나는 죄인이다.
내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성을 느낄 때마다, 이전에 내가 아무 죄책감 없이 행했던 말과 행동들을 똑같이 하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나는 불쾌감에 얼굴을 돌린다.
죄에 대한 혐오와 분노, 그 죄의 행동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잔인한 상처들, 그 상처들로 고통받을 사람들과 그 죄의 결과에 대한 끔찍한 댓가를 영원히 치루어야 할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내 마음도 상처가 아물 날이 없다.
내가 아무리 죄를 혐오한다 한들, 내가 아무리 죄인에 대해 불쌍히 여긴다 한들, 그것이 어찌 하나님의 죄에 대한 혐오와 죄인에 대한 연민에 비할 수 있을까.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악에 대해 혐오하시고 그 혐오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지만, 죄인을 향해 빼어든 무서운 공의의 칼을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겨누시고 그 흘리신 순결한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의 진노를 덮으신다.
죽음 같이 강한 사랑은 불길 같이 타올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며 홍수도 삼키지 못한다.
나는 용서받은 죄인이다.
내 인생의 위기의 순간에, 한 발자국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아득한 절벽아래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날고 말 그 순간에, 그리스도의 차가운 피가 타오르는 죄의 불길위에 부어지지 않았다면 나 자신을 태우고 말았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용서는 내 인생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끊임없이 내 삶에 흘러내리고 있음을 본다.
나의 열정적인 헌신과 그럴듯한 선행이 한 바가지의 자비와 긍휼을 얻어낼 수 있는 자격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에, 그 샘에서 끊임없이 자비와 긍휼이 흘러나오므로 아무런 댓가없이 그저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분의 사랑을 입었기에 나는 오늘도 그것을 마신다.
한 바가지의 자비, 한 바가지의 용서가 아니라 끝없이 샘솟는 자비와 용서를 마시며 나의 영혼은 평안하다.




인간 본성의 4중 상태 - 요약




1. 무죄의 상태


사람은 무죄의 상태로 지음받았다.
즉, 하나님은 사람을 전적으로 의롭게 지으셨다.
하나님이 사람을 이 세상에 두실 때 사람은 무죄의 상태에 있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특유의 의를 지닌 존재로 지으셨다.
사람이 지음받았을 때 지녔던 의는 그의 영혼의 모든 기능과 능력이 도덕법에 순응하게 하는 의였다.
사람이 지음받았을 때 맨 처음 부여받은 이 의를 본래의 의(Original Righteousness)라고 부른다.
이 본래의 의는 이성, 의지, 감정 세 가지 면에서 하나님을 만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 형상의 일부분인 지식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따라서 율법과 그 율법에 따르는 의무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또한 사람의 의지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과 잘 어울렸다.
그의 의지에는 부패가 전혀 없었으며 악을 향하는 성향도 전혀 없었다.
이는 정확하게 말하면 죄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때 사람의 의지는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선을 향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창조주의 뜻을 그대로 따르도록 되어 있었다.
즉, 선과 악에 대해 균등한 성향을 지닌 상태가 아니었다.
율법은 아담의 영혼에 새겨졌다.
율법에 대한 지식이 그의 지각에 새겨졌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율법이 새겨져 율법이 명하는 모든 것을 행하려는 자연스러운 성향을 부여받았다.
이때 사람은 매우 영광스러운 피조물이었고 하늘의 총애를 받았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완전한 평온이 있었고 청아한 즐거움 및 순수한 재미를 누리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알고 그분을 알아가는 지식과 그분과 함께 나누는 교제는 아담의 깊은 마음속까지 가장 고상하고 신기한 즐거움을 줄 수 있었다.
또한 사람은 죽음을 모르는 불멸의 상태에 있었다.
무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은 거룩하고 행복했으며 주께서는 그 뿌리(아담)에 복을 두셔서 복이 모든 가지들로 퍼지길 원하셨다.
따라서 사람의 파멸 원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자신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율법 전체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 자신의 잘못으로 그 능력을 잃었다.
그러므로 지금은 사람들이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율법에 대해 완벽한 순종을 요구하시고 또한 완벽하게 순종하지 못한 자들을 정죄하시는 것은 가장 공정하다.




2. 본성의 상태


그러나 사람의 본성 안에서 슬픈 변화, 곧 믿기 힘든 전복이 발생했다.
처음에 사람의 본성 안에는 악한 것이 전혀 없었는데 지금은 선한 것이 전혀 없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사람의 마음은 이제 정반대가 되어 악한 계획의 공장이 되었고 모든 불경건의 창고가 되었다.
지각, 생각, 의지, 감정 모두가 더럽혀졌다.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 즉 마음이 그 안에서 생각과 판단과 선택과 목적과 도모와 원함과 모든 내적 동의에 의해 꾸며내는 것들이 다 악하며, 또한 심지어 그 마음의 생각의 틀, 곧 이런 생각, 판단, 선택, 목적 등을 만들어 내고 주조하는 틀도 악해졌다.
사람의 마음은 늘 뭔가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단 한 가지라도 선한 것을 내지 못한다.
사람의 생각은 오직 악할 뿐이다.
사람의 생각 안에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참되고 선한 것들이 전혀 없다.
성경은 인간 본성의 타락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셨더라”(창 5:1).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더라”(창 5:3).
이 두 구절에서 우리는 사람이 지음받을 때의 형상과 태어날 때의 형상이 상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운 피조물을 지으셨다.
하지만 타락한 아담이 아들을 낳을 때는 하나님의 모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모양대로 낳았다.
즉, 부패하고 죄악된 아담은 부패하고 죄악된 아들을 낳은 것이다.
모든 사람의 부패한 본성은 욥기에서도 나타난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 14;4).
더러운 부모로부터 나오는 것은 자연히 더러운 자녀들일 수밖에 없다.
이 죄악의 더러움은 인간의 삶을 문제투성이로 만든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더러운 사람으로 태어난다.
뿌리가 썩었다면 가지들도 반드시 그러하다.
부모들이 은혜로 정결하게 된다고 해도 그 거룩한 부모가 부정한 자녀를 낳는다.
그들은 자신의 자연적인 본성을 자녀들에게 전달해 주지만 자신의 은혜를 전달해 줄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의 부패한 본성은 다윗의 고백에서도 나타난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다.
하지만 모태에서 덩어리가 생겨날 때 그 덩어리는 죄악의 덩어리였다.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 우리 주님의 확고한 주장은 모든 사람의 부패한 본성을 알려준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라”(요 3:6).
요한복음 3장 6절이 말하는 의미는 모든 사람이 부패하고 죄악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이 육이기 때문에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우리의 본성의 부패가 절대적으로 중생의 필요를 보여 주는 것처럼 중생에 대한 절대적인 필요는 분명하게 우리 본성의 부패를 입증한다.



본성의 부패는 많은 쓰디쓴 열매들을 맺는다.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호 4;2).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요”(막 7:21~22).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하고 불경하고 비열한 사람들을 보는 것은 당신 자신을 거울로 보는 것과 같다.
당신은 그 거울 속에서 당신 자신의 부패를 깨달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본성의 부패가 그들뿐만 아니라 당신에게도 똑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당신의 삶이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은 것이 당신 자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게 될 것이다.




이해의 부패



사람은 본성상 전부 부패했다.
영혼에 있어서 본성의 타락은 모든 기능 전반, 곧 이해, 의지, 감정, 양심, 기억에 다 퍼졌다.
가장 중요한 기능인 이해(깨달음, 총명)의 기능은 원래의 영광을 잃고 혼동으로 덮였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신령한 것들을 깨달을 수 없다.
사람의 생각과 이성은 판단과 더불어 늘 악할 뿐이다.
다음의 사실들은 이해의 부패를 입증하고 있다.



첫째, 인간의 지각은 영적인 것들과 관련해서 본성적으로 약하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일들과 사업을 잘 이해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는 매우 미련하여 배우지 못하지만,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는지 또는 어떻게 자신의 탐욕을 채울 수 있는지 알려주면 신속하게 이해한다.
그러나 자신의 영혼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 또는 어떻게 자신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는지 알려주면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둘째, 사람의 이해는 영적인 것들에 대해 본성적으로 지독한 어둠에 휩싸여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었더라‘(엡 5:8).
죄가 영혼의 창문들을 닫자 어둠이 영혼 전체를 덮는다.
우리는 영적으로 맹인으로 태어나며 은혜의 기적 없이는 회복될 수 없다.
당신이 누구든 거듭나지 않은 자라면 이 경우에 해당한다.
우리 지각의 본성적인 어둠은 아무런 치료제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안약만이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할 수 있다.
본성적인 인간은 영적인 것들에 대한 구원의 지식이 없다.
인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만나본 적이 없고 죄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은혜를 모른 채 아무리 꾀가 많더라도, 그 꾀는 영적인 실체들을 아는 데 있어서 두더지처럼 눈이 먼 상태에 있다.



셋째, 인간의 지각 안에는 악으로 기우는 본성적인 성향이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으로 기울기 때문에 기회만 닿으면 물 만난 고기처럼 매우 쉽게 악을 행한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렘 4:22).




넷째, 육신의 지각은 영적인 진리를 대적하면서 받아들이기를 싫어한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불신앙의 악한 마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참 종교에 계시된 진리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인간은 말씀의 약속들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말씀의 경고들을 믿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영의 특별한 역사에 의해서 내적인 조명의 복을 받아 신령한 진리와 하늘의 영광을 아는 자들이 얼마나 적은가!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유혹과 시련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파선시키던가!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그들의 고백과 삶에서 나타내는 불일치를 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치 복음이 단순한 우화인 것처럼 여기며 산다.
만일 당신이 성경의 교훈을 믿는다면 어떻게 주 앞에서 당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 그렇게 무관심할 수 있는가?
어떻게 그토록 중대한 자신의 거듭남의 문제에 대해 지극히 무관심할 수 있는가?




다섯째, 사람의 지각 안에는 그의 정욕이 좋아하는 거짓과 허위에 치우치는 본성이 있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시 58:3).
우리는 우리의 첫째 조상으로부터 타락한 본성과 함께 이 거짓과 허위에 치우치는 본성을 물려받았다.
이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로서 우리는 마귀의 신조의 첫 번째 조항인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를 들 수 있다.
마귀가 이 조항을 우리의 첫 번째 조상에게 쑥 내밀자 그들은 그 조항을 받아들였다.
이 조항은 자신의 정욕을 따라 행하는 본성적인 사람들의 삶에 널리 퍼져 나갔고, 그들은 여전히 “우리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원칙을 붙들고 있다.
그들은 종종 한 단계 더 나아가 공언된 저주의 말을 들을 때도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신 29:19)고 말한다.
여섯째, 사람은 본성적으로 그 생각이 교만해져 있다.
본성적인 인간이 자신을 높게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은 외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해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낮게 생각한다.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시 50:21).
복음의 교훈과 그리스도의 신비는 그에게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실제 삶에서도 그것들을 그렇게 대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세상의 통치 하에 두고 자신의 육적인 이성의 법정 앞에 세운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건방진 자세로 하나님의 사역과 그분의 말씀을 견책하고 정죄한다.





의지의 부패



명령 기능인 의지는 처음에는 하나님께 충성하며 그분의 뜻에 따랐지만 지금은 반역자로 변하여 마귀를 따르며 그를 위한다.
몇몇 사람들이 자유의지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데, 인간의 자유의지는 고작 도덕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을 뿐 율법의 영적인 관점에는 절대 반응하지 않는다.
다음의 사실들은 의지의 부패를 입증하는 것들이다.



첫째, 중생하지 않은 의지는 참으로 선한 것들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완벽한 무능을 드러낸다.
사람은 옳은 것을 안다.
하지만 그들은 그른 것만 따른다.
사람의 양심은 옳은 길을 알려 주며 옳은 것을 인정하지만, 그들의 의지는 결코 옳은 길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유의지의 부패는 모든 사람에게 본성적인 쓴 뿌리다.
자유의지가 어던 용도로 사용되든 그것은 사람의 본성에 따라 악한 마음과 삶에 은신처를 제공하기 위해 넓은 그림자를 쳐 준다.
복음을 듣는 청중은 어떤 교단에 속한 사람이든지 전부 이 전염병에 걸려 있다.



둘째, 중생하지 않은 의지는 선을 싫어한다.
우리는 어린 아이들이 본성적으로 죄악된 자유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얼마나 규제를 싫어하던가!
소발의 관찰에 따르면 사람은 본성적으로 거칠고 고집이 세다.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욥 11:12).
사람들은 선한 일에 금새 싫증을 느낀다.
이는 거룩한 의무는 그들의 부패한 본성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세상 일들에 대해서는 어떤지, 육적인 친구들과 함께 할 때는 어떤지 주목하라.




셋째, 인간의 의지 안에는 본성적으로 악으로 기우는 경향, 곧 죄를 향하는 통탄스러운 경향이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쪽으로 기운다”(호 11:7).
한쪽에는 거룩과 생명을 두고 다른 한쪽에는 죄와 죽음을 두라.
그후 중생하지 않은 의지를 내버려 두면 그것은 반드시 거룩을 거절하고 죄를 택할 것이다.
이는 마치 산에서 물을 부으면 위로 가지 않고 아래로 흘러내려가듯, 그리고 불꽃이 아래가 아니라 위를 향하듯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어린아이는 똑같은 무게라면 네모난 것보다는 둥근 것을 더 잘 움직일 수 있다.
이는 둥근 것이 더 잘 움직이기 때문이다.
둥근 것은 건드리기만해도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은 죄의 길에서는 쉽게 움직이지만 거룩한 길에서는 지독하게 무겁다.
우리는 그 이유가 본성의 편향 및 마음의 성향으로 인해 사람의 의지가 악으로 기울어 치우쳤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의지는 결코 본성적으로 거룩과 악에 대해 동등한 균형을 지닌 상태가 아니다.
즉, 악을 껴안는 것이 쉬운 만큼 거룩을 껴안는 것은 어렵다.
사람이 본성적으로 변하게 되어 있을지라도 악에서 악으로 변할 뿐, 악에서 선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인간의 의지는 동등한 균형 상태에 있지 않고, 그릇된 쪽으로 강력하게 기울어져 있다.





행위 언약의 길



복음의 길에서 죄인은 전가된 의의 옷을 입고 주님 앞에 서야 한다.
하지만 부패한 본성은 고유의 의를 추구한다.
인간의 본성은 언제나 스스로를 쌓으며 자랑할 근거를 취하려 한다.
하지만 복음의 위대한 계획은 자랑을 배제시키기 위해 본성을 억누르고 은혜를 높인다.
인간의 본성적인 종교를 요약하면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위해 선을 행하자는 것이다.
복음의 종교를 요약하면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를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이다.


믿음은 그 영혼이 모든 것에 있어서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인데, 이는 인간의 본성이 볼 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죄인이 믿음을 지니려면 강력한 힘의 역사가 필요하다.
부패한 본성은 율법의 길 또는 행위언약으로 편향되어 있다.
따라서 본성적인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 구원을 추구하는 한 이 길에 관련되며 그 길에서 결코 떠나려 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그 길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다.
만일 인간의 의지가 본성적으로 율법으로 얻는 구원의 길로 기운다면, 이는 복음의 계획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의 본성적인 근성은 그리스도와 반대되는 율법의 길로 향한다.
마치 오염된 그릇이 그 안에 부어진 본래의 술맛을 바꾸는 것처럼 본성적인 인간은 복음을 율법으로 바꾸어 버리며 은혜의 언약을 행위 언약으로 변환시킨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그토록 집착하면서도 제단과 희생 제물이 가리켰던 그 모든 것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를 거절했다.
본성적인 인간은 그리스도의 방 안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의 대신에 믿음, 회개, 순종과 같은 것들을 놓고 나온다.
그들은 이로 인해 새 법을 이룬 양 그것들을 대단히 의지한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의를 세우느라 바쁘다.
하지만 그 의는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설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비틀거리는 이 의를 위해 그 모든 고생을 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그 의가 그들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의에 대항하여 서게 하는가?
그것은 모든 면에서 그들을 은혜의 빚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어떻게든 은혜에 굴복하지 않게 하려는 교만한 마음이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마음 가운데 자비를 구하지 않을 것이다”(시 10:4).



본성적인 인간의 종교 활동에 있어서 그들의 최고 목표는 자기 자신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위해 또는 이생의 유익을 위해 종교적인 의무를 수행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만 그분 때문에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찾는다.
이는 자신들의 안녕을 위하는 것일 뿐 사실은 전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의 인생 전체가 실제적인 신성모독, 곧 자신을 목적으로 하여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는 일에 사용된다.
그렇다. 그들의 주된 목적은 자기 자신이다.
이제 인간의 의지를 더 이상 자유의지라고 부르지 말고 정욕의 노예라고 부르라.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는 중생하게 하는 은혜가 죄악의 밧줄을 끊어 줄 때까지 마음껏 악을 저지르지만 선을 행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3. 은혜의 상태



은혜의 상태는 본성의 회복이 시작된 상태이다.
은혜에 의한 변화의 결과는 영생이다.
은혜의 상태는 중생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나타나는 변화이다.
중생은 전인에게 실제로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변화이고 중생의 일반적인 수단은 “씨”로 불리는데 그것은 영적인 씨, 곧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은혜의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거듭난 자들이다.
모든 은혜로운 사람들, 곧 하나님의 은총의 상태에 있으면서 은혜로운 성품들과 성향을 부여받은 자들은 중생한 사람들이다.




중생



중생은 완전한 실제적 변화로서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중생에 의한 변화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속성들, 곧 성향들의 변화다.
악한 속성들이 제거되고 그 자리에 정반대의 성향들이 들어온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
중생을 통해서 새로운 본질이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속성들 또는 성향들이 주입된다.



둘째, 중생은 초자연적인 변화다.
거듭나는 자는 성령으로 태어난다.
중생에 있어서는 본성 그 자체가 변화하며 우리는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게 된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죽은 자가 자신을 죽음에서 일으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오직 거룩케 하시는 성령 외에 누가 새로운 마음을 줄 수 있겠는가?



셋째, 중생은 하나님의 모양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함이라”(고후 3:18).
사람은 그의 본성적인 상태에 있어서 마치 자녀가 그의 아비를 닮듯 마귀를 닮는다.
하지만 이 행복한 변화가 임하면 사탄의 형상은 지워지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도다”(롬 8:29).
따라서 중생을 통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넷째, 중생은 전반적인 변화다.
중생은 영과 혼과 몸을 전부 변화시킨다.
성령의 열매는 전인 안에서의 선함, 곧 지각의 선함과 의지의 선함과 감정의 선함이다.




다섯째, 그 사람의 모든 부분이 다 새롭게 되지만, 각 부분이 완벽하게 새롭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갓난 아이가 사람의 모든 지체를 다 지니고 있지만 그 중에 완전한 성장에 이른 것은 하나도 없듯이, 중생 역시 모든 부분에서 전부 새롭게 되지만 거룩함에 있어서 계속 성장해야 한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여섯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은 영구적인 변화이기 때문에 결코 전적으로 소멸되지는 않는다.
중생에 의해 주어진 생명은 그 어떤 부패의 상태에 있더라도 결코 그 생명을 잃게 되는 일은 없다.




중생은 지각을 계몽시킨다.
중생을 하면 그 지각이 빛을 받아 영적인 것들을 알게 된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
“모든 것을 아느니라”는 뜻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안다는 뜻이다.
사람이 거듭나면 그는 책이 아니어도 성령에 의해 배운다.
성령님은 그들이 귀로만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을 눈으로 보게 함으로써 다시 가르쳐 주신다.
그들은 아버지가 그렇다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믿는 어린아이와 같이 주의 계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중생은 의지를 새롭게 한다.
의지는 선한 것을 원하지 못하던 철저한 무능을 치료받는다.
악을 싫어하는 성향이 의지 안에 심긴다.
중생을 통해 사람은 자기 안에 새로운 영을 얻게 되고 그 영은 육신과 대항하여 다툰다.
새롭게 된 의지는 죄에 대항하여 싸우며 죄의 뿌리 및 그 가지들을 친다.
이제 정욕들은 탄식하고 영혼은 그 정욕들을 굶긴다.
의지는 선을 향하는 선향과 편항과 근성을 부여받는다.
새롭게 된 의지는 부패한 본성이 죄악의 정욕들을 지닌 것처럼 거룩한 분투를 지닌다.
이처럼 새롭게 된 의지는 하나님과 경건을 향한다.
본성적인 사람은 자신을 주된 목표로 삼았고 자신의 의지를 법으로 삼았다.
그러나 사람이 중생을 통해 새롭게 지어지면 은혜가 이 무질서를 어느 정도 바로잡는다.
새롭게 된 의지는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그의 주된 목표로 다시 삼게 만든다.
중생케 하는 은혜에 의해 의지는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게 된다.
율법 전체가 은혜로운 영혼에 깊게 스며들었다.
즉, 율법의 모든 부분이 새롭게 된 마음에 새겨졌다.
율법은 절대로 지워지는 일이 없고 지워질 수도 없다.
의지는 또한 중생케 하는 은혜에 의해 주의 섭리적인 뜻에 따를 것이다.
따라서 그 사람은 자신의 인생 방향을 더 이상 주관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을 위한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새롭게 된 의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려는 성향을 지닌다.
영혼은 그리스도께 굴복하는 것에 만족한다.
그는 기꺼이 그리스도의 명령의 멍에를 메고 십자가를 지며 주를 따른다.
그는 어떤 조건 하에서도 그리스도를 택하기를 기뻐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그의 마음속으로 영접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살리시는 성령으로 그 영혼 안에 들어가실 것이며, 이에 그는 죄에 대해 죽고 영적인 삶을 시작할 것이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첫 번째 생명의 행위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위대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인식의 즉각적인 결과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중생은 감정이 올바른 대상을 향할 수 있도록 교정해준다.
전에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지 못함으로 그분을 갈망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이며 그분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는 행복뿐만 아니라 거룩을 바란다.
또한 위대한 자보다는 은혜가 충만한 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는 약속의 말씀에 기초한 영생의 소망을 즐거워한다.
그의 소망은 영혼의 닻과 같이 그 마음을 붙들어 시련을 통과하게 만든다.
그의 사랑은 고취되어 주님만을 향하며 주의 거룩한 율법을 사랑한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원수들도 사랑한다.
그의 미움은 죄를 향한다.
자신의 죄와 다른 사람들의 죄를 미워한다.
죄는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죄가 쾌락의 샘이었지만 이제는 눈물의 샘이다.
그의 기쁨과 즐거움은 주 하나님 안에 있다.
그는 주의 얼굴의 광채를 기뻐하고 주의 법을 즐거워한다.
그는 주의 백성이 자신과 같기 때문에 그들을 기뻐한다.
이제 죄책은 양심을 예리하게 만든다.
양심은 과거의 죄악들에 대해 쓰라린 후회를 하며 그 영혼을 걱정과 슬픔과 자기혐오로 가득 채운다.
그 후 양심은 부드러워지면서 죄와 책임에 대해 예리해진다.
그는 울타리를 넘는 것을 두려워한다.
경건의 의무를 등한시하며 살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마음에 들어온 이후부터는 더 이상 그렇게 행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사람이 거듭나면 그는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게 될 것이다.
기도를 전혀 하지 않던 사람이 은혜의 성령을 받으면 그의 안에는 간구하시는 성령이 거하실 것이다.
그의 헌신은 이전에는 미신적이고 형식적이었지만 이제는 마음과 혀가 하늘로부터 나온 산 숯에 닿은 것처럼 영적이며 살아있는 헌신이 된다.
그는 임무만 다하려고 조심하면서 안주하기보다는 모든 의무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써 구한다.




당신이 새로운 출생에 대해 문외한이라면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은혜의 상태에 있는 모든 자들은 전부 거듭난 자들인가? 그렇다.
거듭나지 않은 당신은 은혜의 상태에 참여한 바도 없고 몫을 가진 것도 없다.
다음 몇 가지는 중생의 절대적 필요성을 입증한다.



첫째, 중생이 없이는 믿음이 없다.
믿음은 새로 태어난 영혼의 활력있는 행보다.
어떤 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어떤 자들은 예수님을 거절하는데 이는 중생하게 하는 은혜가 그 차이의 참된 원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 중생한 척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이는 믿음은 부패한 본성의 영역에서 자라나는 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중생이 없는 사람의 행실은 죽은 행실이다.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흠이 없고, 몸은 금식으로 줄어들며, 무릎은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 뿔처럼 딱딱해져 가는 사람이 거듭나지 않았다면, 그 한 가지 사실 때문에 그의 모든 것은 훼손된다.
만일 당신이 거듭나지 않았다면 당신의 기도는 주께 가증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열린 입을 “시체로 가득한 열린 무덤”으로 여기신다.
당신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명분을 위해 행한 모든 것은 이 땅에서 보상을 받을 수는 있어도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
당신이 마음과 삶에 있어서 죄에 대항하여 아무리 싸우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신이 중생하지 못한 상태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다.




셋째, 중생이 없이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전혀 없다.
그들은 거룩한 척 행세하고 흉내를 낼 수는 있어도 참된 거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들이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이 종교적인 의무를 행할 때 어떻게 만족함이 있겠는가?





넷째, 당신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가지려면 중생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중생하지 못한 자는 천국에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천국 역시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은 천국을 전혀 즐거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는 요한복음 15장 1~8절에서 매우 분명하고 충분한 지지를 받는다.
이 부분은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 설교의 일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포도나무에 그리고 그들을 가지에 비유하시며, 그들과 자신의 연합의 신비에 대해 가르치셨다.



첫째, 그분은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신다.
주님이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신 주된 목표는 그분 자신이 그분의 백성이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있게 하시는 지원자이며 공급자라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서다.



둘째, 그분은 자신의 백성들을 가지에 비유하신다.
가지에는 두 종류가 있다.
줄기에서 처음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가지와 맨 처음에 생명을 준 나무에서 잘려나가 다른 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가지가 있다.
모든 사람이 타락한 포도나무인 첫째 아담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왔다.
하지만 그들 중에 택함을 받은 자들은 그들의 자연적인 줄기에서 끊어져 나가 참 포도나무인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지게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택함받은 자들, 곧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자들 사이의 연합을 이해하려면 다음을 알아야 한다.



첫째, 그 연합은 영적인 연합이다.
남편과 아내가 결혼에 의해 한 육체가 되듯이 그리스도와 참 신자들은 영적인 연합에 의해 한 영이 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 8:9).



둘째, 이 연합은 실제적인 연합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영혼과 몸 사이의 연합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 연합의 실체는 의심할 수 없다.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 있는 연합은 공상이 아니라 가장 실재하는 것이다.



셋째, 이 연합은 가장 가깝고 친밀한 연합이다.
그리스도는 태 안에 있는 아이와 같이 그들 안에서 형성되어 그들 안에 계신다.
그분은 마치 그들의 영혼이 그들의 몸 안에 사는 것처럼 그들 안에 사신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 17:21).



넷째, 이 연합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연합이다.
일단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그분 안에 항상 거하게 된다.
그분은 우리 마음 안에 처소를 잡으시면 결코 떠나지 않으신다.
“내가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렘 32:40).
하지만 혹시 그 죄인이 스스로 이런 실수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이는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이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마귀들이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 주님은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고 말씀하신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8~39절에서 “사망”이 아무리 끔찍하고 “생명”을 아무리 바랄지라도 악한 천사들인 “마귀들”이나, 마귀들을 대행하는 이 땅의 “권세자들”이나, 우리에게 이미 임한 악한 “현재 일‘이나, 우리에게 임할 ”장래 일“이나, 세상적인 즐거움의 ”높음“이나,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깊음“이나, 선하든 악하든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영원한 상태



인간은 죽음에 의해 영원한 상태로 들어간다.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돌려보내시리이다.”
중생하지 못한 자들의 상태는 죽음의 때에 절망적이다.
율법은 그들을 분명하게 대적하며 정죄한다.
그들이 무시해 왔던 구세주는 이제 그들의 심판자이시다.
그들은 불신앙으로 자비를 대항하며 그들의 대문에 빗장을 쳤다.
공의의 칼은 아무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자비의 문을 지키지만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지체들에게는 자비의 문을 열어 준다.
이는 그들의 머리에 속죄하는 피, 곧 중보자의 피가 덮여 있기 때문이다.
공의가 그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그 문을 통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통과할 수 없다.
필자는 당신에게 다음과 같은 일을 부탁하겠다.



첫째, 분명하지 않은 토대에 세워진 소망을 주의하라.
당신의 소망이 아무리 아름답게 세워져 있더라도, 당신의 과거의 소망들이 철저하게 무너지고 완전히 새로운 토대 위에 새로운 소망을 세운 것이 아니라면 그 소망은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둘째, 어두울 때는 밝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보면 그 광채를 잃는 소망을 주의하라.
성경의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거룩한 진리에 의해 조명될 때 가라앉는 소망은 망상이지 참된 소망이 아니다.



셋째, 성경적인 증거들에 의해 지지를 받지 못하는 소망을 주의하라.
당신은 죽음 이후에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라고 소망하는데, 당신이 그 소망을 갖는 근거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가?
성경적인 증거에 의해 지지를 받지 못하는 소망들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붙들더라도 결코 서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파멸될 것이다.



넷째, 당신의 영혼을 더 거룩하게 하지 못하고 또한 당신이 하늘을 위해 준비하고 갖추게 하지 못하는 소망을 주의하라.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만일 당신이 죽음의 때에 죄악 가운데 쫓겨나지 않으려면, 당신의 죄악의 상태에서, 당신의 죄악된 삶으로부터 신속히 나오라!
이 세상에서 끔찍하게 떠나야 한다는 이 사실을 고려함으로 당신이 완전하시고 충만하시며 전능하신 구속자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피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생각이 당신을 사로잡아 죄악에서 끄집어내어 거룩한 마음과 삶으로 인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만일 제 때에 죄악을 떠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죄악에 합당한 장소인 지옥에 이를 때까지 죄 가운데 계속 살아야 한다.
이는 죄가 지옥에 자리를 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떠날 때, 당신의 모든 죄악들, 곧 태어날 때부터 죽는 날까지 지은 모든 죄악들이 몰려와서 당신에게 매달려 당신과 저 세상까지 함께 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신은 수많은 진노들에 의해 영원히 둘러싸일 것이다.



죽음의 때에 경건한 자의 상태는 희망찬 상태다.


첫째, 그들은 그들보다 앞서 다른 세상에 가 계시는 믿을만한 좋은 친구가 있다.
그들의 가장 좋은 친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이 그들을 옮겨 가는 땅의 주인이시다.
그들은 죽음 이후에 엄중한 시험, 즉 심판을 지나야 한다.
그러나 경건한 자의 경우는 이 모두가 희망차다.
이느 그 땅의 주인이 그의 남편이며 또한 재판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도다”(요 5;22).
구속자는 그들의 머리요 그들은 그 분의 지체이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저 세상의 주님과 그토록 가깝게 연결되고 연합되어 있는 자들의 경우는 죽음의 때가 희망차지 않겠는가?



둘째, 그들은 또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는 안전한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들은 참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시 23:4)를 지나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주신 그 땅의 안전통행증, 곧 그분의 피로 인증한 통행증이 있다.
죽음은 그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다.
죽음이 몸에서 영혼을 떼어낼 수는 있어도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 몸을 떼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망을 폐하셨도다”(딤후 1:10).
그러므로 사망은 단지 겁을 주는 “걸어다니는 그림자‘일 뿐, 성도들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셋째, 그들은 저 세상으로 기쁘게 들어갈 것이다.
죽는 날은 경건한 자에게 좋은 날이다.
그날은 그의 최고의 날이다.
몸이 죽을 때 그 영혼은 완전하게 된다.
죽는 날 그 자체가 경건한 자들에게는 기쁨의 날이다.
그날은 그들의 구속의 날로서 포로들이 해방되는 때이며 죄수들이 석방되는 대다.
그날은 영광의 상속자들이 여행을 마치고 자기들의 고향에 돌아와서 아버지 집에 들어가 영광스러운 기업을 실제로 소유하게 되는 날이다.
지금은 약혼의 때지만 그 날은 그들의 결혼식 날이다.



필자는 우리가 편안하게 죽으려면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지 지침을 알려주면서 이 주제를 결론짓겠다.




첫째, 깨끗한 양심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신경을 써라.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행 24:16).
양심에 남아 있는 죄책은 두려움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라.
죽는 시간에 분과 앙심을 품지 않을 수 있도록 해이한 삶의 방식을 주의하고, 방심 및 불규칙한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라.
날마다 당신의 잘못과 허물과 죄로부터 양심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보혈을 새롭게 적용하라.
죽음이 당신에 찾아왔을 때 당신이 그 “샘”에 있는 것을 발견하도록 하라.



둘째, 당신의 변화를 기다리며 항상 깨어 있으라.
편안하게 죽는 방법은 날마다 죽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주 죽음을 시도하라.
무덤에 자주 방문하여 죽음에 대해 심각한 묵상을 하면서 죽음과 친밀해지도록 하라.
당신의 행위를 자주 돌아보고 죽음이 당신을 잡아갈 때 어떤 삶의 여정 가운데 발견되기를 원하는지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 생각에 따라 행하라.



셋째, 가능한 많이 세상으로부터 당신의 마음을 멀어지게 하라.
이 땅의 즐거움의 겉옷을 대충 걸치고 있으라.
그러면 죽음이 당신을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려고 올 때 그 옷을 쉽게 벗어 던질 수 있을 것이다.
합법적인 삶의 위로들이라도 심한 애착을 지니지 않도록 절제하여 그런 것들에 마음을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라.



넷째, 하늘에 들어갈 권리에 대한 증거들을 부지런히 모으고 쌓아 두라.
당신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지 자주 점검하고, 잘 보이지 않는 감추어진 증거들을 빛으로 끄집어 내어 주목하도록 하라.
당신의 양심의 법정 앞에서 스스로를 점검하라.
제일 먼저, 주의 말씀으로부터 중생한 상태의 표시들을 정리해 보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리라”(잠 8:17).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도다”(시 18:2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 3:3).



이 구절들로부터 중생의 증거들을 모으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 위에 있는 최고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편견없이 대단히 귀중하게 여긴다. 그는 모든 것들 중에 그에게 가장 쉽게 달라붙는 죄와 대항하여 씨름한다. 그는 거룩한 율법을 승인하고 사랑하되, 심지어 율법이 그가 아끼는 정욕을 대항하여 공격하더라도 그리한다. 그의 하늘의 소망은 온 세계의 거룩함을 연구하도록 만들고, 그 안에서 그는 이생에서는 비록 이룰 수 없을지라도 완전을 목표로 삼는다. 그는 주님을 섬기되 예배의 행위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삶을 통해서 섬긴다. 그는 삶과 예배 행위 가운데 원칙과 동기와 목표와 섬김의 목적에 있어서 영적이다. 하지만 그는 주 앞에서 자신 안에는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충만하심은 그의 영혼의 거처다. 하나님 앞에서의 칭의와 그분의 영접에 대해서 그는 그리스도가 아닌 그 어떤 것도 신뢰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가능함을 믿는다. 또한 거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특징들이 발견되는 모든 사람은 주의 말씀에 따라 하늘에 들어갈 권리를 지니고 있다.]



- 책의 내용을 요약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김정철 성도
댓글목록

최덕수목사님의 댓글

김정철 성도님! 고전읽기를 마치고 이렇게 요약과 함께 독후감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요약을 잘 하셨는지요^^ 기독교 고전은 우리에게 늘 큰 깨달음을 주지요. 기독교고전은 얄퍅한 것으로 치장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부터는 도무지 나올 수 없는 깊은 묵상과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 나온 내용들로 가득 차 있어서 언제나 우리에게 크나큰 유익을 가져다 주지요. 늘 그러셨지만 앞으로도 더욱 성경과 기독교고전 읽기에 힘써 주시고 좋은 글 많이 올려 주십시요!

이 요약본을 보면서 저는 이 책을 읽은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글을 보고 요약본을 보았으니 안 읽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마시고 반드시 원본(인간의 4중 상태)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제 아내도 이 요약본은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만 유익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귀한 글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김정철님의 댓글

사실 독후감을 써서 올려야 하는데 몇 줄의 문장과 저의 얄팍한 성경지식을 가지고 이 영적인 책의 내용을 충분히 전달할 수 없을리라는 사실에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중요한 내용을 요약해서 올리는 것이 그나마 낫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요약본을 읽어서 얻는 유익보다 책 전체를 읽지 않음으로 겪는 영적 손실이 더 클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라는 광대한 동굴을 탐험하는 긴장감과 감동을 경험했고 다음 고전읽기 시간이 더욱 기다려집니다.
한 학기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시는 만큼 성도들의 영적 필요를 채우는 일에 힘을 다해 수고하기를 기뻐하시는 목사님을 뵈면서 목사님을 좀 더 잘 알게 된 것도 저에게는 의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참 감사드립니다....

김원동님의 댓글

책을 아직 잡아보지는 못했지만, 독후감을 읽고,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도의 교제가 말뿐인 말과 아첨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이러한 신학적 주제들과 삶에서 주와 동행한 경험들을 나눔으로써 이루어질 때, 그것이 가져다 주는 영적인 양식이 참 달콤하다는 것을 더 절감하게 됩니다. 귀한 나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