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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49 2004.04.20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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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양육에 관한 좋은 글이 있어 한 번 번역해 보았습니다. 이 글을 쓴 Peter J. Leithart는 신학자이자 미국 장로교 목사님으로 0살부터 17살되는 9명의 자녀를 키우고 있습니다. 이 분은 자녀 양육 관련 전공자가 아니시고 성경 신학자시지만 많은 아이들을 지금껏 키워오시며 5가지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혹시 영어로 책읽는 것 개의치 않으시는 분은 이 분이 쓴 “A house for my name”을 읽어 보시라고 추천 드립니다. (Amazon.com에서 구입 가능).

Five Maxims for Parents

1. 아이들 역시 죄인이며, 무죄하거나 본래부터 선하지 않다. (시편 51:5; 로마서 3:9-18)

예수님께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아이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할 좋은 믿음의 예로 드셨다.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도 아담의 후손이므로 원죄의 오염에서 예외일 수 없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 아담이후 인간의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원죄가 인간을 죄악가운데 빠지게 하는데, 원죄란 아담이 범한 첫벗째 죄, 근본 의가 없어진 것, 그리고 우리의 모든 본성이 타락한 것을 말한며 원죄로 부터 나오는 모든 것이 죄다”. 어른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 역시 이러한 죄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타고난 부패의 본성은 여러가지 면으로 드러난다. 아기가 우는 것은 유일한 의사소통의 수단이므로 굳이 죄라 할 수 없다 ; 비록 루터는 찬송시 “Away in Manger(찬송가 ‘그 어리신 예수’)에서 예수님께서 우시지 않으셨다고 썼지만, 예수님께서는 아기때 우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는 없으셨다. 그러나 우리 아기들은 우는 것으로 의사소통에 지나는 행동을 한다. 신생아는 자기의 필요가 즉각 채워지지 않을 때 자기의 분 혹은 참을성 없음을 우는 것으로 표현한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우리 아기들은 자신을 콘트롤하려하거나 자신에게 권위를 행사하려하는 사람에게 저항한다. 나의 아내인 Noel과 나는 우리 아이들이 한 살이 되기이전에 “No”의 의미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우리 아이들은 계속해서 그 한계를 시험하려 들었다. 우리 갓난쟁이는 쓰레기 통을 만지면 안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나는 그 아이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을 자주 발견하곤 했다. 컴퓨터 키보드를 만지려는 한살배기 아들에게 “No”라고 말했을때, 난 그 아이의 얼굴에서 ‘그래도 만져, 말어’ 고민하는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어떤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더 순종적일 수는 있어도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다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원죄에 대해 알고 있으나, 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 별로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는 듯 하다. 우리들은 아이들의 죄를 진짜 죄로 생각하기를 꺼려한다. 그 대신에 우리 부모들을 그들을 위해 변명을 해 준곤 한다. 물론 아주 어린 영아의 경우 “No”의 의미를 아직 배우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이 일단 그 의미를 배웠으면, 더 이상 순종하지 않는 아이를 “아직 어려서 이해를 못해서 그래…”하고 변명해 주면 안된다. 잘 협조해서 놀지 않는 아이에게 “얘가 오늘 좀 피곤해서…”라고 변명해 주어서는 안된다. 아이들이 싸우고 서로에게 막 대할때 “남자애들은 남자 애들이야…”라고 변명해 주어서는 안된다. 어떨때 우리들은 “우리 애는 거짓말 안해, 혹은 우리 애는 절대 무엇을 훔치거나 남을 속이지 않아..” 라고 말하면서 성경이 우리 아이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전적인 부패성에 대해 믿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죄를 죄로 깨닫고 인식해야만 한다. 간혹 환경이 아이들을 과도하게 흥분하게 하거나 싸우게 할 수도 있지만, 환경이 아이들의 죄를 덮어주는 변명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 만약 우리 아이들이 잘못된 행동을 했을때는 그것이 죄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아이에게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책임을 회피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첫번째 말하고 싶은 것은 “아이들을 위해 변명거리를 만들지 말라” 이다.

이 말은 우리 부모들에게 굉장한 도전을 주는 말이다. 어린 아이가 어린 아이를 기를 수 없듯이,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성숙된 어른으로 키우고 싶다면 우리 스스로가 어른처럼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늘 변명하는 부모, 자신이 섬겨야 할 권위에 거역하고 반항하는 부모,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부모에게서 성숙된 자녀의 모습을 기대하기는 거의 불가능 하다.


2. 우리들은 부모이고 아이들은 우리의 자녀이다

이것에 대해 나는 몇가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우리들은 부모로서 무엇이 아이들에게 유익한지 아이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은 달콤한 것, 아이스크림을 야채보다 더 좋아한다. 아이들은 비록 이해를 못할지라도 부모들은 이빨을 닦는 것이 왜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우리들은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일정 시간의 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낮잠잘 시간이나 취침 시간을 정해 준다.

우리가 부모라는 의미에는 우리가 원칙을 정한다는 것도 포함된다. 물론 그 원칙은 공평해야 하며 성경적이어야 한다. 만약 부모가 원칙을 부모 마음대로 이랬다 저랬다 한다면 아이들은 자기가 언제 그것을 어겼는지 알 수도 없을 것이고 혼란스럽게 된다. 아이들이 부모 역시 어떤 원칙( 마음 내키는대로 만든 것이 아닌) 아래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특별히 아주 어린 아이에게 가르쳐야 할 근본적인 원칙은 십계명중 제 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다. 부모님이 하시는 모든 말이나 지시는 규칙이 되어져야 한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부모님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모라는 의미에는 ‘우리가 집안의 원칙을 세울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부모가 만든 그 원칙아래 살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포함된다. 아마도 이것이 부모로서 가장 빈번하게 실패하는 일일 것이다(특별히 초보 부모에게). 예를들면 1) 아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먹으려면 먼저 할당된 야채를 다 먹으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아이는 계속 불평하고 결국 부모는 포기하고 아이스크림을 주게 된다. 2) 딸에게 잘 시간이니 잠자러 방에 들어가라고 이야기 한다. 5분만에 딸은 인형을 달라고 다시 나온다. 3) 부모가 아이에게 이리 오라고 부른다. 그러나 아이는 반대방향으로 도망간다.

이러한 패턴은 부모와 아이들 모두에게 큰 스트레스를 준다. 아이들이 말을 잘 듣지 않기 때문에 부모들은 점점 열을 받는다. 한편 아이들은 화가 난 부모의 불똥을 맞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부모가 당하는 이런 어려움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짧게 보았을때는 아이들이 부모의 말에 그때그때 순종하도록 만드는 데 여분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 반면, 아이들이 어렸을때부터 부모의 지시에 따르도록 하고 규칙을 반드시 지키도록 강화한다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아이들과 부모 모두에게 더 쉬운 길이다. 또하나 게으름은 죄이다. 만약 우리가 아이에게 야채를 다 먹으라고 이야기 했다면 아이가 다 먹는지 끝까지 지켜 볼 필요가 있다. 필요하다면 숫갈로 떠 먹이던가, 다음 날 아침 상에라도 내서 끝까지 먹게 해야 한다. 만약 부모가 아이에게 후식을 먹기전에 야채를 다 먹으라고 했다면 아이는 야채를 먼저 다 먹어야 한다. 만약 부모가 딸에게 들어가서 자라고 했다면 아이는 밖으로 나오지 않고 방에서 있어야 한다. 만약 부모가 아이에게 오라고 했는데 아이가 오지 않으면, 반복해서 명령하거나, 오라고 빌거나, 오면 뭐 줄께 하고 뇌물을 쓰거나, 안오면 죽어 하고 위협하거나, ‘하나, 둘, 셋…’ 세거나 해서는 안된다. 아이에게 즉각 가서 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만약 아이들에게 식탁을 치우도록 지시했는데 아이들이 하지 않는다면 그냥 넘기지 말고 아이들이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규칙을 반드시 지키도록 강화한다는 측면에서, 부모는 아이들이 부모를 조종하려는 시도와 노력을 잘 알아채야하며 끌려가서는 안된다. 아이들이 협박(나 집 나갈거야) 혹은 감정적 어필(아빠는 날 사랑하지 않아) 등의 말로 부로를 조종하지 못하게 하라. 만약 아이들이 그런 종류의 말을 한다면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대개의 경우, 그런 말들은 부모를 조종하려하거나, 부모가 자기를 조종하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이다.

우리가 부모라는 의미에는 아이들이 부모를 반드시 존경해야 한다는 것이 포함된다. 순종과 마찬가지로 존경 역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부모들은 아이들이 우리를 존경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존경을 가르치는 한가지 방법은 아이들에게 부모의 권위와 원칙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시켜 놓았는데 그 일을 끝마치지 않은채 부모를 무시하고 가버리는 것을 묵인한다면, 아이들은 존경심을 잃게될 것이다. 아이들이 특별히 무례(말, 행동, 목소리의 톤, 몸짓 등으로 )하게 행동했을 경우에는 체벌되어져야 한다. 아이들은 단지 태도가 나빴기 때문만이 아니라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체벌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만약 엄마가 아이에게 무엇을 하라고 시켰는데 아이가 무례하게 대답한다면, 그것이 죄이고 바로잡아져야 한다.

첫번째와 두번째 토픽울 보면, 충돌과 대립은 자녀양육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만약 우리 아이들이 자기 고집대로 하려는 죄인이고, 우리가 부모로서 우리 자녀들을 바로 키우려는 책임을 수행하려 한다면 충돌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물론 우리가 충돌을 일부러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충돌이 일어났을때 무시하거나 피해서는 안된다. 자녀양육 과정에서 조용한 평화스러움만을 바래서는 안된다. 평화로 간주되던 것이 어떨때는 깊은 반항(적개심)을 덮는 얇은 막에 불과할 수도 있다. 충돌은 실패했음을 나타내는 표가 아니라, 진지한 노력, 더 나아가 성공으로 가는 표시이다. 그것은 우리가 부모로서 해야할 바를 하고 있다는 표이며, 우리 아이들이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지도하고 있다는 표이다. 만약 평화나 조용한 상태가 최고의 우선순위라면, 그래서 충돌을 피하고 싶다면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이 좋다.


3. 체벌은 자녀 양육에 필요하다.(잠언 19:18; 29:15)

성경은 체벌이 자녀양육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신실한 징계는 영적인 효과가 있다고 약속하고 있다.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잠언 20:30).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언 22:15).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잠언 23:13-14).

때로 크리스찬 부모들 조차도 아이들을 체벌하지 않으려고 ‘아이들이 우리들에게 등을 돌리게 될거야’, ‘체벌은 아이들에게 증오와 폭력을 가르치게 돼’, ‘부모의 권위가 문제를 일으키는 거야’ 등의 이유를 대곤 한다. 이러한 이유들은 고려의 여지가 없다. 체벌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단순한 문제이다. 우리는 체벌을 아주 지혜롭게 사용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체벌 사용하기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체벌은 반드시 사랑과 이해의 상황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체벌이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아닌 상태에서 행해질때, 매질은 심해 보이거나 즉흥적으로 보일수 있어서 아이들이 사랑의 매라고 느끼기 힘들다.

아이가 어릴때는 맴매를 대신할 더 좋은 것을 찾기 힘들다. 아무리 설득력이 좋다한들 차길로 뛰어나가려는 고집센 한 두살짜리 아이와 논쟁할 수가 없다. 그런 아이는 제재를 받을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특별한 환경에서 특별한 아이들에게 다른 형태의 징계가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리고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이 어떤 징계가 가장 효과적인지 찾아낼 필요가 있다.

아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부모들은 반드시 자기 시간을 할애해서 자녀 개개인에게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는 수년간 일주일에 한번씩 내 자녀들중 한명과 데이트를 하였다. 나는 공원이나 커피 샵, 혹은 쇼핑몰에서 한 두시간씩 한 아이와 시간을 보냈다. 이런 시간에 아이와 서로 학교생활이나 미래 계획, 친구 등에 대해 기탄없이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언제 부모는 체벌을 사용하는 것이 좋은가? 부분적으로 부모나 아이에 따라 다르다. 부모들은 언제 말로하는 훈계가 필요하고, 언제 매가 필요한지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가 잘못한 정도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아이가 그 규칙을 어겼을때마다 체벌받는 것이 합당하다. 규칙을 어기는 것은 부모를 거역하는 것이므로 , 부모는 그것을 즉시 바로잡아 줄 필요가 있다. 만약 아이를 불렀는데 아이가 오기를 거절하면 부모는 가서 따끔하게 엉덩이를 때리고 오게 만들어야 한다. 만약 침대에서 자야 할 딸이 계속해서 일어나서 나오면 맴매를 하고 침대로 돌려보내야 한다. 만약 아이가 밥먹는 시간에 자꾸 의자에서 내려오려 하면 맴매를 맞고 의자에 돌아가 앉아서 엄마가 내려가도 좋다고 할때까지 앉아 있어야 한다. 만약 이런 절차를 따르고자 할때 특별히 엄마들은 ‘맴매하다 하루가 다 가겠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와 나의 아내 Noel은 일찍 시작하는 체벌이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효과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체벌은 성경에서 말하는대로 사랑의 행위이며, 사랑의 행위로 보여져야만 한다. 부모는 자녀를 징계할 때 사랑하기때문에 징계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어야 한다. 체벌 후에 부모는 아이를 안아주고, 뽀뽀해 주고, 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고,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체벌한 것’이라고 다시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의 징계는 그저 감상적이거나 모호한 징계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실때 구체적이셨고, 꾸짖으실때도 그 이유가 명료하셨던 것 처럼, 사랑의 징계도 단호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부모는 아이가 규칙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자기가 어떤 규칙을 어겼는가 알고 있는지 등을 확실히 확인해야만 한다. 우리들은 아이들이 자기가 저지른 죄에대해 책임을 지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냥 “미안해”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아이들은 “너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자동차 가져간 것 미안해”, 혹은 “거짓말 한 것 미안해” 등과 같이 구체적으로 말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식으로 아이들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가르쳐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가 화나있을때 아이를 때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 말이 항상 맞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백성들을 진노가운데 가르치실 때가 있었다. 불순종에 대한 분노는 아이들에게 죄에 대한 심각성을 적절히 깨닫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부모가 화가났기 때문에 아이를 때리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그것은 징계라는 이름하에 화풀이 하는 것이요, 아이에게 화를 폭력적으로 표현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체벌은 아이들이 잘못된 것이나 해 되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위한, 아이들의 마음 속에 있는 어리석은 생각들을 제거하기 위한, 아이들이 의의 길로 계속 걸어갈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사랑의 동기에서 행해져야 한다. 성경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사랑과, 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는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것이다.


4. 아이들은 자란다.

이 주제는 자녀양육의 목표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자녀를 양육해 나가는 15-20년동안 우리가 이룩하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이 주된 목적인가? 부모의 기호, 계획, 꿈을 그대로 빼닮은 아이를 만들기 원하는 건가? 아니면 아이들이 부모의 의사는 무시한채 자기의 인생을 자기 스스로 그려 나가기를 원하는 건가? 크리스챤으로서 자녀양육의 목표는 우리 아이들을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하나님의 교회와 그의 나라를 섬기는 성숙된 어른 신자로 키우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신실하다고 가정했을때, 믿음에 관한한 우리 아이들이 우리의 믿음을 본받기를 바란다. 그러나 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있으므로, 우리 자녀가 내가 가진 똑같은 은사를 가지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안에서 부모는 귀의 역할을, 한편 그 자녀는 손이나, 두뇌나, 발가락의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의 아이들이 손의 역할을 최고로 잘 할 수 있도록, 두뇌의 역할을 가장 잘 할 수 있도록, 발가락의 역할을 가장 잘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자기가 가진 능력을 기뻐하고 만족할 수 있도록 양육하는 것이다.

자녀 양육시 통제(control)와 자유(freedom)에 대한 균형이 있어야 한다.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훈련시키는 모습은 눈여겨 보아야 할 좋은 본보기이다. 갈라디아서 3장 23-24절과 4장 1-2절에서 바울은 옛 언약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을 후견인이나 청지기 아래있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아이가 유업을 이을 자이나 어렸을 때는 종과 다름없다고 이야기 한다. 바울이 이야기 하려는 촛점은 옛 언약 구조를 고려할 때 더욱 명료해 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먹을지(레위기 11장), 무엇을 입을지(레위기 19장 19절, 민수기 15장 37-41절) 말씀해 주신바 있다. 일반적인 몸의 신진대사 기능들이 우리 몸을 부정하게 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 목욕을 해야만 했다(레위기 12-15장). 그들의 삶은 통제와 규제가 매우 심했다.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이러한 모든 명령들은 오늘날 교회에도 매우 교육적이고 교훈적이다(디모데훗 3장 16-17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세부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나가고 있는지 아직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신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초급적인 규례들을 지킬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장성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이들을 기를때 여런 단계를 거치게 된다. “당신의 자녀는 더이상 어린아이가 아닙니다”라는 책을 쓴 제리와 메리라는 저자는 자녀와 부모간 관계를 4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구분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자라면서 부모의 역할이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 대략적인 아웃라인을 그려볼 수는 있을 것이다.

1) 아이들이 어릴때는 부모가 아이들을 통제한다.
어린 아이의 경우 토론이나 질문없이 즉각적으로 부모를 순종하도록 훈련되어져야 한다. 부모는 어린 아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잘 살피고 감독해야 한다(무엇을 입는지, 언제 잠자리에 들게 할 지, 어떻게 수저를 사용하는지, 어떻게 음식을 씹는지 등등). 이 단계에서 부모는 아이를 위해 정말 많은 일을 해야만 한다. 이상의 것들이대략 7-8세되는 아이를 키울때 유의할 사항이다(연령의 범위는 다소 다를 수 있다).

2) 아이가 대략 8세부터 십대까지 부모의 역할은 조언자로 바뀐다.
조언한다는 것은 상세하고도 지속적으로 아이를 지도한다는 뜻이다. 조언자는 가르치고 바로잡아 준다. 반면 아이는 조언자의 조언은 따라올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형이나 누나일수록 더 큰 책임감과 독립심을 갖게된다. 부모는 자기 자녀에게 작은 일거리를 주고 작업 능력을 평가해 봄으로써 이 아이의 책임감과 독립심을 시험해 볼 수 있다. 예를들어 8, 9세되는 아이들이라면 우체국에 가서 우표를 사오거나, 가게 가서 신문을 사오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아빠가 아이와 함께 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다음에는 아이를 혼자 보낼 수 있다. 아주 낮은 단계에서 시작해서 책임감을 점점 늘려나가는 것이 좋다. 아이들이 너무 갑작스럽게 당황할 만한 일을 주지말고, 스스로 일을 처리하고 자신감을 늘려나갈 수 있도록 지도하되 실패했을때 그것을 통해 배울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주어야 한다.

3) 조언자가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다면, 아이들은 점점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들은 간혹 특별한 상황에서 조언자에게 조언을 구하겠지만 점점 더 스스로 의사를 결정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 단계가 제리와 메리가 ‘상담’이라고 부르는 단계이다. 이 기간동안에 부모는 아이들이 조언을 부탁할 때만 조언을 해주고, 아이들이 자신의 방법대로 무엇을 해 볼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도 부모는 어느정도의 통제를 행사한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죄 지을 자유를 주어서는 안된다. 예를들어 내 자녀들이 내 집에 사는 동안은 내 아이들이 주일에 교회에 참석하는 것, 가정예배에 참석하는 것, 하나님의 계명의 지켜나가는 것을 의무로 부과할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역할은 아이들이 독립적인 어른 신자로 자라가면서 변해간다.

4) 자녀들이 어른이되면 우리는 ‘보살핌(caring)’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장성한 자녀들은 부모에게 조언, 때로는 상세한 조언을 구할수도 있다. 장성한 자녀에게도 꾸짖을 일이 있을때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부모는 장성한 자녀에게 불필요한 조언을 피하는 것이 좋고, 스스로 결정하고 실수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지게 하는 것이 좋다.

구체적 적용을 위해 돈을 가지고 예를 들어 보겠다. ‘통제’단계에서는 아이들이 직접 돈을 다룰 수 없다. 용돈을 받았다면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부모의 통제와 감독이 필요하다. 만약 아이가 돈을 선물로 받았다면 부모가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아이와 상의 없이). 만약 아이가 집안 일을 도와서 돈은 벌었다면 부모가 아이를 위해 돈을 관리해 주어야 한다.
일단 아이가 돈을 잃어버리지 않고 챙길 수 있고 셈을 할 수 있게되면, 부모는 ‘조언’단계로 넘어간다. 이 단계에서 아이들이 용돈을 받을 수도 있지만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부분 부모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용돈의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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