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찬송 CD

7,454 2012.12.27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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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서원에서 출간된 '시편찬송가' 중의 34곡을 서울모테트합창단이 불러 녹음한 것입니다.

<왜 시편찬송을 불러야 하는가?>
시편은 교회가 가진 가장 좋은 찬송임에 틀림없습니다. 시편찬송은 구약 이스라엘 성도들의 찬송이었으며 예수님과 사도들이 부른 찬송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저녁 만찬 때, 주님과 제자들은 찬송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26:30). 대부분의 성경 주석가들은 이것이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늘 부르던 시편, 곧 할렐(Hallel)이었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마 27:46; 눅 23:46; 시 22:1; 31:5 참조). 사도 바울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엡 5:19; 골 3:16)'고 하였을 때 '시'는 곧 시편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 성경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 진리의 말씀이요, 우리의 삶과 예배의 유일한 기준이 된다는 점은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시편찬송을 불러야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시편찬송은 단순히 교회나 성도들의 취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과연 어떤 찬송이 하나님께 드릴 만한 좋은 찬송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시편찬송을 부르자고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시편은 교회가 가진 가장 좋은 찬송이자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이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칼빈은 1562년에 출간된 [제네바 시편집(The Genevan Psalter)]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으로가 아니면 하나님을 올바로 찬양할 수 없다고 한 어거스틴의 말은 옳다. 우리가 아무리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여기저기를 찾아다닌다 하더라도 이 목적(찬양)을 이루는데 있어서 성령께서 다윗을 통하여 말씀하신 시편보다 더 나은 것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시편을 찬송할 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입에 허락하신 찬송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바른 신앙 위에 서 있던 모든 주님의 교회는 언제나 시편을 애송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찬송도 시편찬송을 의미했습니다. 칼세돈 공의회 같은 종교회의들도 시편찬송 외의 소위 '비영감적인 찬송'에 대해 반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 암흑기였던 중세를 지나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개혁교회는 다시 시편찬송 전통을 회복했습니다. 물론 중세에도 시편찬송이 완전히 사라졌던 것은 아니지만, 회중찬송으로서의 시편찬송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개혁자들은 이것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했습니다.

루터파를 제외한 나머지 개혁교회들은 공예베시에 모두 시편찬송으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루터파와 성공회 등에서는 성경이 금하지 않았다면 모두 허용할 만하다는 허용적 입장을 취하는 반면,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이 제정하고 성경이 명령하는 것만이 지켜져야 한다는 [예배의 규정적 원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제네바의 칼빈과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는 교회 개혁을 위해서는 예배 개혁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말씀으로 돌아가서 말씀 사역을 강조하는 동시에 예배에서 시편찬송을 고수하였던 것입니다.

개혁교회에서 시편찬송이 어떻게 다시 정착되고 발전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칼빈은 1539년에 스트라스부르그(Strassburg)에서 목회하면서 19곡의 시편과 십계명, 사도신경, 시므온의 찬송 등을 포함하는 작은 시편찬송집을 펴내어 개혁교회의 시편찬송 전통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1542년에 30곡이 추가되어 총 49곡의 시편찬송집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시편곡은 당시 프랑스의 왕 프란시스 1세(Francis 1)의 궁중 시인이었던 클레망 마로(Clement Marot)에 의해서 작시되었고, 칼빈은 그 중 3편만을 직접 운율로 엮었고 나머지는 감수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마로가 1544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제네바에서 시편찬송을 만들어내는 일은 잠시 주춤했습니다. 칼빈은 자신에게 시적 재능이 그리 많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여 그 일을 중단한 채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러던 중 칼빈은 1548년에 29살의 젊은 청년이었던 데오도르 베자(Theodorus Beza)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당시 베자의 책상에서 시편 16편을 운율에 맞추어 놓은 원고의 초안을 보게 되었습니다. 역사가들은 베자가 제네바에서의 예배에 처음 참석하였을 때 회중들이 시편찬송을 부르는 것에 매우 깊은 인상을 받고, 개인적으로 곧바로 시편을 운율에 맞추는 일을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칼빈은 그 초안을 다른 목사들에게 보여주었고, 그드은 모두 마로의 중단된 사역을 베자에게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드디어 1551년에 [데오도르 베자의 34편의 시편곡(Thirty-four Psalms of David by Theodorus Beza)]을 출판하게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이전에 사용하던 49곡과 합하여 총 83곡의 시편찬송집을, 그리고 1562년에는 나머지 시편을 모두 운율에 맞추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제네바 시편집]이 출판되었습니다. 이 시편집은 1565년까지 3년 동안에만 63판 이상 출판되고, 화란, 독일, 영국 등 20여 개국으로 번역 보급되어 당시 모든 개신교 가정들은 이 시편집을 비치하고 사요하였다고 하니, 시편찬송이 개혁교회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전통인가 하는 것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 전통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신실하게 믿었던 청교도들도 그들의 예배에서 시편을 운율에 맞추어 찬양하였습니다. 이러한 이류로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주축이 되어 마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도 시편을 찬송하도록 요구한 것입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장 5절). 예배와 찬송에 대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이러한 입장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영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1564-5년에 걸쳐 만들어진 스코틀랜드 교회의 제1공동의식서(The First Book of Common Order)에는 시편찬송집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시편찬송 외에 다른 찬송가가 전혀 첨가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시편찬송을 교회의 공예배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실제로 19세기 이전까지 모든 개혁교회, 특별히 장로교회에서는 시편찬송 외에는 다른 찬송을 공예배시에 부른 역사가 없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시편찬송은 지난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새롭게 발전해 왔습니다. 세계적으로 각 교단을 망라하여 시편찬송을 부르는 교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유럽이나 북미와 호주같은 영어권 국가들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개혁교회들에서도 이를 번역하여 예배 찬송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시편찬송을 소개하려는 시도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교회 회중 찬송으로환영받지 못한 채 도중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구약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실한 교회들이 불러왔고 지금도 부르고 있는 시편찬송을 한국 장로교회에서 오히려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처럼 취급하고 심지어 백안시하는 풍토가 있다면 이는 이해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날 현대음악과 즉흥적으로 작시된 가사들이 여과없이 복음성가로 만들어지고 있으며, 실제로 이런 복음성가들로 인해 찬송가들과 시편찬송이 예배 찬송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찬양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며, 또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찬양사역자들과 찬양예배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정작 시편찬송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인식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시편찬송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찬송입니다. 시편찬송은 믿음의 선진들이 오랫동안 사랑한 찬송이며 영감된 찬송입니다. 바른 찬양 없이 바른 예배가 있을 수 없습니다.

- 송용조 목사 (양의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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