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교회 건설을 위한 두 가지 제안

14,389 2011.11.29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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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정암 신학강좌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 미국 신학교에서 가르치다 국내에 들어오신 모 신학교 총장 목사님이 '한국장로교회는 순복음 장로교회다'라고 말했던 적이 기억난다. 당시 이러한 지적에 필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는 '장로교회' 하면 장로교 나름대로의 분명한 색깔이 있었다. 그러나 실용주의, 인본주의 사상이 교회 안에 점점 침투해 들어와 이제는 예배형식이나 목회 프로그램만을 보아서는 이 교회가 어느 교파에 속해 있는 교회인지를 도무지 구분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안타까운 일은 명색이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교단도 이런 일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아무리 개혁하려 해도 온전한 개혁교회의 모습을 갖출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혁주의 교회의 이상과 실제와의 갭을 줄이는 일은 결코 포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합신교단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이상적인 개혁주의 교회 건설을 위한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세례와 성찬을 바로 시행해야 한다. 이 이야기는 새삼스런 이야기가 아니다. 칼빈이 말한 교회의 표지 중 하나가 '성례의 올바른 시행'이란 것 정도는 목회자라면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세례와 성찬을 올바로 시행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세례식을 시행한다. 세례를 주어 세례교인이 되게 하는 일은 한 사람을 영광스런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매우 중대한 일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교회들은 다른 양육훈련(전도훈련, 제자훈련)에는 열심을 보이면서도, 세례 교육에는 별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화란개혁교회가 유아세례 교인이 입교하기까지 거의 수 년 동안 매주일 세례교육을 실시하는데 비해, 한국교회는 보통 한 두 달로 끝내 버린다. 이는 카톨릭 교회의 영세 교육기간인 6개월에도 훨씬 못 미치는 짧은 기간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세례교인으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신앙지식을 구비하게 하는 일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아울러 세례 문답도 엄격하게 시행해야 한다. 세례 문답은 세례 받을 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구원의 도리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그리고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는지를 테스트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과정이 대개 통과의례 혹은 붙여주기(?) 식의 문답이 되기 때문에, 성도들이 세례 문답에서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세례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으면 비회심자가 교회 회원이 되고 또 직분자도 되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일은 힘들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개혁교회는 무엇보다 세례를 올바로 시행해야 한다. 성찬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세례교인(입교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한다(고전 11:27-28). 오늘날에는 성찬의 참여 여부를 신자들 스스로 판단한다. 그러나 과거 개혁주의 교회들은 성찬을 앞두고 심방을 실시해서 성찬에 대해 무지하며 믿음도 없이 성찬에 참여하려 하는 자들을 성찬에서 제외시키는 선별적 성찬참여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는 교회의 순수성을 확보하기 위한 권징의 차원에서 시행된 제도로써, 오늘날 개혁주의 교회들도 수용해 볼만한 제도이다.

두 번째로 개혁주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신앙고백서들을 사용해야 한다. 어떤 분들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 예배모범 등)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과거 종교개혁의 소산물이었지 오늘의 상황에는 맞지 않다고 하면서, 성도를 세워 나가는 일에 있어 요리문답 사용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이는 기독교 문화적 자살 행위다. 이 시대에 종교개혁 당시 만들어진 신앙고백서들보다 더 좋은 신앙고백서들이 있는가? 종교개혁 당시 선진들의 피로써 쓰여진 신앙고백서들은 교인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우는 훌륭한 도구였다. 한국교회는 이제 더 이상 요리문답서들을 박물관에 놓아두어서는 안된다. 요리문답을 가르치는 일은 이 시대의 성도들을 견고한 신앙의 사람으로 세우는 일이 됨과 동시에 과거 신앙의 전통을 후손들에게 넘겨주는 책임 있는 일이 될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노력들이 이 시대정신에 대한 저항 행위가 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교회를 올바로 세워나가는 건설 행위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이 글은 개혁신보 칼럼 란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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