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돌아보는 일의 중요성

5,831 2011.11.29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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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하던 교회가 어느 순간 풍비박산이 나서 교단 신문에 기사화되고, 각종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을 볼 때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목사가 면직을 당하고 교회는 사분오열되는 이런 일들은 과연 누구 탓인가?

물론 교회마다 상황은 다르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교회 지도자들에게 많은 책임과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작금의 정치 현실도 그렇지 않은가? 어지러운 정치 현실에 대한 책임이 국민들에게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책임은 정치인들에게 있다.

교회문제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어릴 때 다닌 모 교회는 우리나라 보수교단에서 유명한 교회였는데 항상 교회 안에 분란과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대부분의 문제들은 목사 장로들이 일으켰다.

대개 교회 안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면 목사가 나가든지 장로가 나가든지 한다. 문제가 더 확대되면 나가지 않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파가 나뉘어 대립양상을 보이다가 결국에는 명예훼손, 교회당 소유권 분쟁 등 법정소송으로 비화된다. 자기 이익 추구를 위해 형제를 세상 법정에 고소했던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현실이 된다.

과연 이 문제를 목회자 한 사람이나 개 교회 탓으로만 돌려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이런 문제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으며, 문제가 일어나더라도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우선 노회나 시찰회가 관할 교회를 제대로 돌아보아야 한다. 목사와 개 교회가 노회의 지도를 받아야 된다는 장로교 치리원칙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며, 심방을 통해 교인들의 영적 형편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목회자도 없다. 그런데 시찰회가 교회를 돌아보지 않아도 별로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

물론 제대로 교회를 돌아보는 노회나 시찰회가 없지 않겠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교회들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조직은 있으나 활동이 없고, 활동이 있더라도 너무 미미하다. 세속정부에는 감사원과 같은 감찰 기구가 있어 각 부서가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지, 재정은 원칙대로 집행되고 있는지 등의 여부를 감찰하며 위법 여부가 드러나면 사법기관에 회부한다.

그런데 교회는 어떤가? 개 교회의 자세한 상황은 그 교회의 지도자나 교인들 이외에는 알지 못하고 있으며, 교회문제가 바깥으로 흘러나와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을 정도가 되어도 시찰회나 노회 편에서 먼저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개 교회 치리회의 주권을 너무 배려하다가 문제가 곪아 터진 다음에 비로소 노회가 개입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감사기관이나 사법기관이 존재하는 목적은 범죄자를 검거하는 일에만 있지 않고 범죄를 예방하는데도 그 목적이 있다. 노회와 시찰회가 이미 일어난 문제에만 개입하고,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교회가 갈기갈기 찢기는 일은 계속해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로 당회가 제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당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신학에 조예가 있고 진리를 분별할 줄 아는 장로들이 많이 세워져야 한다. 요즘 대기업의 사외 이사들처럼 대표이사의 결정에 손이나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에 위배될 때는 견제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세워져야 한다. 그래야 한 사람에 의해서 교회가 휘둘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세 번째는 지도자 자신이 욕심을 버려야 한다. 대개 교회 문제가 법정 소송으로 비화되는 일의 중심에는 금전문제가 있다. 결혼할 때는 그토록 아름다워 보이던 두 사람, 자기 보다는 배우자를 위해서 수고하며 헌신하던 부부가 이혼할 때는 명예나 체면 따위는 내팽겨 치고, 위자료를 덜 주고 더 받으려는 줄다리기를 계속하다가 가정법원의 판결을 통해서 비로소 끝을 낸다.

교회 문제가 법정 문제로 확대되는 것도 손해는 덜 보고 이익은 더 얻으려하기 때문이다. 이왕 막나가게 된 바에 조금이라도 이익을 더 챙겨야겠다는 마음이 앞선다. 명예와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다면, 대부분의 교회문제는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요, 설사 문제가 일어나더라도 속히 해결될 것이다.

죠나단 에드워즈는 선별적 성찬론에 대해 심하게 반대하는 교인들을 두고 수 십 년간 목회했던 교회를 미련 없이 떠났다. 어느 한 편이라도 욕심만 버리면 문제는 해결된다.

시찰회가 명실상부한 시찰의 기능을 강화하고, 당회가 견제 기능을 회복하고, 지도자가 욕심을 버리면 교회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뼈아픈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이 글은 2004년 4월 2일자 개혁신보(www.rpress.or.kr) 시론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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