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 서론

성경본문 :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 서론 이남규 목사 2022.04.17
2,650 2022.04.18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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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팔츠 교회법(1563)의 요리문답서 소개

팔츠교회법(1563)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첨부하기 전에 『요리문답서에 대하여’(Vom catechismo)』란 제목 아래 요리문답서에 대해 소개한다. 다음과 같은 요리문답서에 대한 정의로 시작한다.

우리 기독교에서 요리문답서란 기독교교리의 중요한 부분에 대해 짧고 간결하게 구두로 하는 설명인데, 여기서 어린 자들과 잘 모르는 자들에게 그들이 배운 것이 무엇인지 반복해서 물어보고 들어보는 것이다.

이 짧은 정의 이후에 요리문답서는 자녀에 대한 신앙교육이 초대교회부터 있어왔던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이미 처음부터 교회의 신앙교육의 현장은 가정과 학교와 교회였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초판에서 교육기관이 교회만이 아니라 가정과 학교에까지 연결했다는 것을 볼 때, 여기서 가정, 학교, 교회 이 세기관이 신앙교육을 담당했다는 것은 당연한 연결이다. 신앙교육기관으로 교회만이 아니라, 가정 그리고 학교까지 포함하여 언급하는 것은 자주 나타난다.

교회법은 계속해서 신앙교육의 이유를 언급함으로써 신앙교육의 당위성을 말한다. 교회법은 세 가지 이유를 지적한다.
첫째, 본성적 악함이 세력을 갖고 있고, 그에 따라서 교회와 정치권력이 부패하는데, 그 때에 유익한 교리로 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이유는 교회와 정치의 부패의 성향을 전제하고 있다. 이런 부패의 성향을 대항하는 것이 유익한 교리이다.
둘째, 주님의 분명한 명령 때문이다. 교회법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칠 것을 명령하는 성경구절들(출 12:26-27; 13:8-9, 14, 신 4:37-40; 6:1-9; 11:18-21)을 나열하고 신 6:6-7을 직접 인용한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즉 요리문답서 교육은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한 것이다.
셋째, “이스라엘 어린이들이 할례이후에 (그 때 그들은 이해력이 없을 때인데) 언약의 표의 비밀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교육받은 것처럼, 역시 우리 어린이들도 그들이 세례받은 때부터 기독교신앙과 회개가 가르쳐져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주님의 만찬식탁에 허락되기 전에, 전체 기독교회 앞에서 그들의 믿음을 고백해야 한다.” 여기서 팔츠교회법은 요리문답서 교육에 있어서도 신구약의 통일성을 말하는 것이다. 팔츠교회법은 교회에서 계속 있었던 이 신앙교육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소위 ‘견진성사’로 대체되면서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이제 요리문답서 교육은 ‘견진성사’에 대한 개혁이 된다.



2. 요리문답서 초판이 말하는 필요성

팔츠교회에서 요리문답서와 교회법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요리문답서가 그 내용이라면 그 실천의 방법을 규정한 교회법은 내용을 담는 그릇과도 같다. 선제후는 교리에서만이 아니라 외적 예식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의 바른 지식으로 인도되기를 원한다. 즉 프리드리히 3세에게는 교리교육만이 아니라 예식과 실천 전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위한 신앙교육의 장이다. 따라서 요리문답서와 교회법은 같은 필요성과 목적을 갖는다. 실제로 교회법의 서문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초판 서문에서 말했던 필요성과 목적을 요약한 후 교회법에도 똑같은 필요성과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교회법에서 반복하여 말하는 요리문답서가 필요한 이유는 ‘오류’와 ‘불일치’다. 그래서 확실한 요리문답서를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식과, 성례의 집례와 다른 실천들에서 똑같이 ‘바름’과 ‘같음’이 요구된다. 교회법의 서문은 상대적으로 짧을 뿐 아니라, 그 필요성과 목적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서문에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에, 선제후가 요리문답서 초판에서 밝히는 내용을 고찰하는 것이 의미있을 것이다.


가. 소명의식

초판 서문은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교회와 학교의 사역자들에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필요성과 목적을 밝히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공포하는 선제후의 자기 소명의식을 가장 먼저 만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의무가 단순히 백성들의 삶을 평화롭고 평안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인식하는 중요한 소명은 “무엇보다도 전능하신 이와 그의 구원하는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경외를 가르치고 거기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경외”라는 선제후의 소명의식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선제후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이 후대에 전달되어야 하며, 후대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권위를 두고 경외하기를 원했으며, 자신이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믿었다. 그는 그 일을 위해 온갖 수고를 다했으며 예상되는 희생을 치를 각오를 했던 것이다. 팔츠의 신앙교육의 출발점은 이런 소명의식 곧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경외였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위한 소명의식은 종종 간과되어지나 이것 없이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


나. 팔츠의 상황

이런 소명의식 아래서 선제후는 두 가지 상황을 언급한다. 첫째, 더 나은 개혁을 위한 열망이다. 프리드리히 3세 이전 선제후들도 개혁을 시도했었고 오트하인리히의 경우 실질적인 팔츠의 종교개혁을 이뤄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3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선임자들이 만들어 놓은 규례와 조치들을 유익한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바라던 열매들을 맺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이런 상황은 프리드리히 3세가 선임자들의 규례와 조치들을 다시 되풀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개혁하고 선명하게 해서 계속 실행하게 했다고 진술한다.
프리드리히 3세가 언급하는 첫 번째 상황은 팔츠가 처한 형편을 보여준다. 프리드리히 2세가 몇 가지 조치들을 취했고 오트하인리히가 교회법을 개혁했지만 아직 팔츠의 형편은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선임자의 규칙과 조치들을 단순히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하겠다고 밝히는 것은 루터주의와 개혁주의 사이의 갈림길에서 멈출 수 없는 상황을 암시한다. 이제 팔츠는 개혁을 향하기 위해서 새로운 요리문답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두 번째 젊은이들이 처한 형편을 언급한다. 프리드리히 3세가 발견한 팔츠교회의 현실은 “피어나는 청춘들이 학교와 교회에서 기독교 교리를 아주 경솔하게 또는 한편 전혀 가르침을 받지 않거나, 한편 다르게 또는 지속적이고 확실하고 통일적인 요리문답서가 아니라 각자의 마음과 판단에 따라 가르침을 받고 교육받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신앙교육의 부재 또는 제멋대로의 신앙교육으로 여러 잘못된 결과들이 나오게 되는데, 특히 “그들이 종종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말씀지식 없이 자라난다는 것이다, 일치하는 교육을 받지 못하고 또는 그렇지 않으면 계속되는 쓸모없는 질문들로 또 이따금 이질적인 교리로 시달린다”는 점을 지적한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 대한 염려가 프리드리히 3세의 염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이 염려의 핵심에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그가 서문에서 자주 말하는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다. 우리가 위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의 말씀에 대한 지식은 그가 팔츠의 통치자로서 갖는 소명의식의 핵심이었다. 팔츠의 통치자로서 그의 소명의식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경외”로 자기의 공민들을 인도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청소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의 말씀에 대한 지식 없이 자라나는 것이 이 소명의식을 크게 자극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이델베르크가 나오게 된 배경 또는 이 요리문답서의 바탕에는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깔려있는 것이다.


다. 지향점

프리드리히 3세의 소명의식과 더 나은 개혁을 위한 열망과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교육부재라는 상황은 팔츠를 위한 요리문답서를 만들게 한 충분한 동기가 되었다. 이러한 동기로 선제후가 요리문답서를 만들 때 두 가지 기본방향을 세웠다. 요리문답서가 지향하게 될 두 방향은 ‘바름’과 ‘같음’이다. 즉 팔츠는 요리문답서를 통해서 바른 교리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된 교육을 추구하는 것이다. 바름과 같음은 한 묶음으로 서문에 자주 등장한다. 청소년들이 처음부터 “순수하고 같은 형식의 교리로” 배워야 한다. 요리문답서를 통해서 “오류와 상이성”을 없애야 한다. 가르침을 받는 자들인 청소년들은 “경건한 가르침을 통일되게” 가져야 한다. 가르치는 자들인 설교자와 교사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날마다 다른 것을 문답하면 안되며”(같음을 위하여), “그릇된 교리를 도입하면 안된다”(바름을 위하여). 이처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반포하며 그의 마음에 그렸던 팔츠 교회의 모습은 바르고 같은 신앙 정신 아래에 있었다.
‘바름’과 ‘같음’을 위하여 팔츠교회가 산출한 것은 ‘요리문답서’였다. 바름과 같음은 아무 목적 없는 것이 아니라 첫 출발점이었던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목적한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요리문답서에 연결되는가? 프리드리히 3세의 서문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교리와 요리문답서에는 어떤 모순이나 갈등은 발견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것이 요리문답서이기 때문에, 요리문답서를 가르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함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육 또는 요리문답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만든 것이다.” 이 요리문답서를 가르치는 것이 곧 기독교교리를 가르치는 것이고, 이 요리문답서의 가르침과 성장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요리문답서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요리문답서를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3세가 진술하는 신앙교육의 목표는 단순한 교리적 지식에 대한 교육이나 교리적 개혁이 아니라 삶 전체의 개혁이었다. 선제후는 하나님의 구원하는 말씀을 “모든 덕과 순종의 유일한 기초로” 규정한다. 따라서 “훈육과 정직과 다른 모든 선한 덕들”은 어려서부터 교리와 복음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르칠 때 가능하다. 서문을 마무리하면서 프리드리히 3세는 가르치는 자들 즉 교회의 목사들과 교사들에게 그들이 요리문답서를 가르치는 것만을 당부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가르치고 행하고 살기’를 권한다. 정리하면 프리드리히 3세에게 신앙교육과 생활교육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신앙교육이란 성품과 인격과 생활로 나아가서 덕을 갖춘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가 단순한 교리적 정보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선한 덕들을 갖추며 삶으로 살아내는 것까지를 의미했던 것이다.
신앙교육의 영향이 생의 모든 부분까지를 포함했을 때, 이런 영향은 피교육자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신앙교육에 참여하는 공동체 전체에게 나타난다. 팔츠의 신앙교육의 직접적인 대상은 자라나는 이들이지만 그 유익을 그들만 갖는 것이 아니다. 서문에 의하면 이 신앙교육을 교회의 사역자들만의 의무로 말하지 않는다. 교회의 직분자들만이 아니라 세상의 직분자들, 정부와 가정을 언급한다. 즉 신앙교육에 참여하는 것은 교회만이 아니라 학교와 부모, 나아가 사회전체가 된다. 선제후는 사회전체가 신앙교육에 참여하므로 모든 덕목들에서 교육대상인 자들만이 아니라 사회전체가 자라난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자라나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함과 말씀에 대한 지식에 대한 교육을 소홀이 한다는 것은 직접적인 후대의 세대만이 아니라 가정과 교회와 학교와 사회전체가 소홀한 것이고, 유익들을 잃게 된다는 의미다. 신앙교육에 참여할 때 전 구성원이 자라나지만, 소홀히 할 때는 전 구성원에게 해가 미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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