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이 우리의소망이다(좋은 설교말씀)
08.02.09

사7: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사7: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

사7:12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사7:13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7: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사7:16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 바 되리라

1) 우상이 있을 때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지 않게 된다.

오늘 본문에는 참으로 놀라운 거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하스 왕은 남쪽 유다 왕으로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하스가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에 의해서 포위되어 거의 죽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두려워 떨던 그를 향하여 긍휼을 베푸십니다. 아하스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유다를 파괴하려는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의 계획이 실현되지 못할 것이니 안심하라고 말씀해 주십니다(6-8절).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아하스의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려고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징조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 징조를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이런 제안을 딱 잘라 거절합니다.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12절). 참으로 놀라운 거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아하스 왕은 굉장히 절박한 상황 속에 놓여져 있습니다. 아직 전투가 시작되기 전인데도 아하스 왕과 그 백성의 마음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두려움으로 흔들렸습니다(2절). 그만큼 위기의 상황이었습니다. 사람이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제안을 단번에 거절합니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거절해 버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대답은 한 가지입니다. 아하스의 마음속에 우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하스는 자기 나름대로 어떤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위쪽에 있는 연못을 막아서 물이 흘러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공격하는 군대를 막아보려는 자기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아하스에게는 믿는 구석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여차하면 강대국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그들의 군사력을 빌려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렇듯 아하스에게는 자기 자신의 방법과 이 세상의 방법을 믿는 마음이 이미 있었습니다. 우상이 그의 마음을 이미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랜 세월 그런 우상을 의지하며 살아왔고 절대절명의 위기 앞에서도 그런 우상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아하스는 하나님께서 제안하시는 구원에 대한 약속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귀하게 생각할래야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의 마음속에 자기 방법과 이 세상 방법이라는 것이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아침에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우리가 나름대로 의지하고 기대는 것들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소중히 여길 수 없게 되고, 그것을 거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구원과 은혜가 제시되어도 그것을 구할 만한 의지나 열심이 생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구원과 은혜를 힘입지 못하고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려운 결과입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말하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구원을 간절히 찾고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그만큼 다른 우상들이 세워져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하스의 불신앙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마음을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구원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얼마나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는지요?
옛날에 아하스에게 ‘깊은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11절)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은혜와 긍휼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 하나님의 이런 부르심 앞에 우리의 반응은 무엇인지요? 정말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을 간절히 소망하며 믿는지요? 새벽잠을 깨우고 나온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는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고 있는지요? 하나님의 약속하신 은혜와 구원이 오늘 우리 삶에 절실히 필요하다고 믿으며 하나님을 바라는지요?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주님이 베푸시는 도움과 은혜를 간절히 구하며 믿지 않는다면, 아하스 왕처럼 딱 잘라 거절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간절히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 안에 우리가 의지하는 다른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돈이든, 건강이든, 사람들이든 여전히 의지하고 있는 다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하스와 같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우리의 마음과 삶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우상들을 제거해 주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간절히 의지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가 신자의 위로와 소망의 근거이다.

비록 아하스는 하나님을 불신하였지만, 아하스가 다스리고 있는 남쪽 유다에는 경건한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생각하시는 하나님은 친히 징조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4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시려고 보여주시는 징조가 무엇인지 잘 보십시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나시는 것은 이사야가 지금 예언을 하고 있는 이 시대보다 적어도 800년 후에 있을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그 일을 징조로 들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지금 당장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어떤 징조를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금방이라도 유다를 집어삼킬 것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그 앞에서 삼림의 나무들처럼 흔들리고 있습니다.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안정시키고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면 무엇인가 현실적인 어떤 징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하늘에서 갑자기 우박이 떨어진다든지 말입니다. 백성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그것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징조를 보여주시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처럼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에 어떻게 하십니까? 앞으로 까마득히 먼 800년 후에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힘을 내라고, 소망을 가지라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이상합니다. 왜 하나님은 800년이나 지난 다음에 있을 일을 징조로 보여주신 것일까요?
대답은 분명합니다. 처녀의 몸에서 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이 땅을 사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결정적인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도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여기에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큰 증거로 무엇이 제시되어 있습니까? 그 아들을 이 땅에 사람으로 보내신 그 일입니다. 이 땅에 사람으로 보내사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어주신 일입니다. 이 일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큰 증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랑을 어디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확증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에서입니다. 이것이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에, 비록 800년 후에 있을 일이지만, 그것을 징조로 삼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보아라, 내가 내 아들을 아끼지 않고 세상에 보내어 너희와 같은 사람이 되게 할 것이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죄인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는 내가 너희와 늘 함께 한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일컬을 것이다.”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는 인생에서 확신과 소망과 위로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현실적인 축복이나 건강이나 형통함을 보고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런 것들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징조로 삼는다면, 우리의 확신은 늘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건강이나 돈이나 형통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건강하고 모든 일이 잘 될 때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 속에 살다가도, 병에 들고 일이 잘 안 풀리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항상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만듭니다.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는 말씀으로 위로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에서도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확신과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2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도 자신의 위대한 확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켜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 그러면 사도 바울은 이런 확신을 어디에서 얻었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32절). 하나님께서 하나 뿐인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그 일을 바라보면서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곤란과 위기의 상황 속에서 무엇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죄의 세력이 여러분을 짓누르고 있습니까? 마음의 부패함 때문에 원치 않는 악한 생각과 악한 행동을 하고 있어 괴롭습니까? 세월이 흘러도 크게 변함이 없는 여러분의 신앙 상태 때문에 낙심이 됩니까? 현실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힘든 일이 있어 낙심이 됩니까?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와 한결같이 모든 일에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을 결코 떠나지 않으시고 임마누엘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따라 적절한 때에 은혜와 구원을 풍성히 베푸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이런 예수님이 우리 눈에 희미하다면,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십시오. 예수님을 분명하게 보여 달라고 부르짖으십시오. 그리하여 담대한 확신을 얻어 이 세상을 살아가십시오. 오늘 하루도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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